할머니도 산후도우미 신청에 ‘예산 벌써 바닥’ [취재후]

입력 2025.08.01 (21:03) 수정 2025.08.0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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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률 반등'이 국가적 의제인 상황, 정부에선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산후도우미 비용을 지원하는 '산모·신생아 건강관리 사업'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산모가 업체에서 산후도우미를 지원받으면, 정부가 최대 90%까지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산모가 업체에서 산후도우미를 지원받으면, 정부가 최대 90%까지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

그런데 문제는 올해,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던 산후도우미 지원금을 상당수 지역에서 줄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산후조리 도와주시는 부모님이 지원을 받을 수는 없나?"

먼저 배경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가족을 산후도우미로 쓰면 안 될까?'라는 생각, 한 번쯤 해보셨을 건데요.

지난해까진 이게 불가능했습니다. 정부가 '일은 하지 않고 돈만 받아 가는', 부정 수급을 우려해 산모의 민법상 '가족'은 산후도우미 비용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규제가 불합리하다는 불만이 제기됐습니다.

민법 제779조(가족의 범위) ①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2.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
② 제1항 제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한다.

법대로라면, 산모의 친정어머니는 산후도우미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경우 '따로 살 때만' 가능한 상황입니다. (시어머니라도 같이 살면 불가)

국민 제안과 온라인 투표를 거쳐 산후도우미 관련 지침이 변경.국민 제안과 온라인 투표를 거쳐 산후도우미 관련 지침이 변경.

"어차피 산후조리에 도움받는 건 가족인데 왜 안 되지? 그리고 안 되면 다 같이 안되는 거지,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나?"라며 민원이 빗발쳤습니다.

그 결과 이 규정은 올해부터 사라지면서 가족도 산후도우미 비용 지원이 허용됐습니다.

이렇게 규정이 바뀌며 산후도우미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수요 폭증으로 예산 소진

열흘 동안 친정어머니를 산후도우미로 등록하고 지원받을 경우, 산모가 28만 원가량을 내면 친정어머니는 107만 원 가까운 돈을 지원받습니다. 적지 않은 돈이죠.

이렇게 되면서, 그동안 외부 도우미를 쓰는 걸 꺼렸던 산모들도, 친정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을 산후도우미로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후도우미 이용 비율도, 산후도우미의 수도 크게 늘며 예산이 소진됐습니다.산후도우미 이용 비율도, 산후도우미의 수도 크게 늘며 예산이 소진됐습니다.

지난해 기준 부산에서 태어난 아이의 50% 정도만 산후도우미 지원을 받았는데, 이게 올해는 80% 정도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부산에서 등록된 산후도우미의 수도 701명에서 1,70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수요가 급증하며 자치단체가 산후도우미 비용을 지원하려 받아둔 돈을 다 써버린 것입니다.

부산시와 구·군은 산후도우미 지원 사업을 위해 1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편성하고, 5억 원가량을 더 받았습니다.

그런데 7월 초 기준 남은 예산은 1억 5천만 원에 불과합니다.


부산 16개 구·군 중 6곳은 다음 달 안에, 다른 곳은 10월 안에 1년 치 예산을 다 써버릴 상황입니다. 정책 자체의 취지는 좋은데, 이걸 살리지 못할 상황에 부닥친 겁니다.

취지는 좋아도, 절차는 거쳐야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럼, 수요가 늘어날 걸 예측 못하고 예산 편성한 공무원 잘못 아냐? 미리 알고 돈을 더 많이 받았어야지!"

그러나, 자치단체가 이를 예측해 반영하기는 어려웠을 걸로 보입니다.

보통 지자체 예산은 8월부터 11월 사이에 편성되는데, 가족을 산후도우미 지원 대상으로 허용한 건 지난해 12월 중순이기 때문입니다.

12월 18일 있었던 정부의 황당 규제 공모전 발표12월 18일 있었던 정부의 황당 규제 공모전 발표

정부는 '황당 규제 공모전'이라는 걸 통해 관련 규정을 갑자기 바꿨는데요, 12월 4일부터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규제에 대한 온라인 투표를 일주일간 벌였습니다.

그 뒤, 일주일 만에 정책 검토를 거쳐, 12월 18일 '내년부터 가족도 산후도우미 등록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주도 지나지 않아, 올해 바로 시행됐습니다.

보통 정책을 만들 땐 관련 부서, 산하 기관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런 과정이 생략된 거죠.

실제로 부산시 관계자는 "지침이 발표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피해는 업체의 몫

많은 산후도우미 업체가 이르면 이달 중순부터 지원금을 전혀 받지 못할 상황에 부닥쳤습니다.많은 산후도우미 업체가 이르면 이달 중순부터 지원금을 전혀 받지 못할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원금은 뒤늦게 내년에 예산이 확보된 뒤 지급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산후도우미들과 산후도우미 업체의 몫입니다. 한 산후도우미 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달에 도우미 1명 당 150만 원 정도를 줘야 하는데, 20명이면 3천만 원이에요. 9월부터 적어도 석 달 이상은 월급을 제 돈으로 메꿔야 해 1억 원 정도 대출을 신청했습니다.

막상 업체 운영을 중단할 수도 없는 게,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기 때문에 매출을 줄일 수도 없어요. 대출 이자는 계산도 안 해봤습니다."

(한 산후도우미 업체 대표)

앞서 규정이 바뀌며 지원이 허용된 산모의 가족들도 결국 업체에 등록해 돈을 받아야 하는데, 업체가 무너진다면 이들 역시 지원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산을 거의 다 써버린 만큼 마땅한 대책도 없는 만큼, 보건복지부 재정을 통해 해결하거나 자치단체의 저리 대출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규제를 풀고 속도감 있게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정책이건 가장 중요한 건 사업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좋은 사업 취지를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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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머니도 산후도우미 신청에 ‘예산 벌써 바닥’ [취재후]
    • 입력 2025-08-01 21:03:27
    • 수정2025-08-01 21:05:04
    취재후

'출생률 반등'이 국가적 의제인 상황, 정부에선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산후도우미 비용을 지원하는 '산모·신생아 건강관리 사업'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산모가 업체에서 산후도우미를 지원받으면, 정부가 최대 90%까지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
그런데 문제는 올해,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던 산후도우미 지원금을 상당수 지역에서 줄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산후조리 도와주시는 부모님이 지원을 받을 수는 없나?"

먼저 배경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가족을 산후도우미로 쓰면 안 될까?'라는 생각, 한 번쯤 해보셨을 건데요.

지난해까진 이게 불가능했습니다. 정부가 '일은 하지 않고 돈만 받아 가는', 부정 수급을 우려해 산모의 민법상 '가족'은 산후도우미 비용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규제가 불합리하다는 불만이 제기됐습니다.

민법 제779조(가족의 범위) ①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2.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
② 제1항 제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한다.

법대로라면, 산모의 친정어머니는 산후도우미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경우 '따로 살 때만' 가능한 상황입니다. (시어머니라도 같이 살면 불가)

국민 제안과 온라인 투표를 거쳐 산후도우미 관련 지침이 변경.
"어차피 산후조리에 도움받는 건 가족인데 왜 안 되지? 그리고 안 되면 다 같이 안되는 거지,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나?"라며 민원이 빗발쳤습니다.

그 결과 이 규정은 올해부터 사라지면서 가족도 산후도우미 비용 지원이 허용됐습니다.

이렇게 규정이 바뀌며 산후도우미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수요 폭증으로 예산 소진

열흘 동안 친정어머니를 산후도우미로 등록하고 지원받을 경우, 산모가 28만 원가량을 내면 친정어머니는 107만 원 가까운 돈을 지원받습니다. 적지 않은 돈이죠.

이렇게 되면서, 그동안 외부 도우미를 쓰는 걸 꺼렸던 산모들도, 친정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을 산후도우미로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후도우미 이용 비율도, 산후도우미의 수도 크게 늘며 예산이 소진됐습니다.
지난해 기준 부산에서 태어난 아이의 50% 정도만 산후도우미 지원을 받았는데, 이게 올해는 80% 정도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부산에서 등록된 산후도우미의 수도 701명에서 1,70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수요가 급증하며 자치단체가 산후도우미 비용을 지원하려 받아둔 돈을 다 써버린 것입니다.

부산시와 구·군은 산후도우미 지원 사업을 위해 1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편성하고, 5억 원가량을 더 받았습니다.

그런데 7월 초 기준 남은 예산은 1억 5천만 원에 불과합니다.


부산 16개 구·군 중 6곳은 다음 달 안에, 다른 곳은 10월 안에 1년 치 예산을 다 써버릴 상황입니다. 정책 자체의 취지는 좋은데, 이걸 살리지 못할 상황에 부닥친 겁니다.

취지는 좋아도, 절차는 거쳐야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럼, 수요가 늘어날 걸 예측 못하고 예산 편성한 공무원 잘못 아냐? 미리 알고 돈을 더 많이 받았어야지!"

그러나, 자치단체가 이를 예측해 반영하기는 어려웠을 걸로 보입니다.

보통 지자체 예산은 8월부터 11월 사이에 편성되는데, 가족을 산후도우미 지원 대상으로 허용한 건 지난해 12월 중순이기 때문입니다.

12월 18일 있었던 정부의 황당 규제 공모전 발표
정부는 '황당 규제 공모전'이라는 걸 통해 관련 규정을 갑자기 바꿨는데요, 12월 4일부터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규제에 대한 온라인 투표를 일주일간 벌였습니다.

그 뒤, 일주일 만에 정책 검토를 거쳐, 12월 18일 '내년부터 가족도 산후도우미 등록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주도 지나지 않아, 올해 바로 시행됐습니다.

보통 정책을 만들 땐 관련 부서, 산하 기관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런 과정이 생략된 거죠.

실제로 부산시 관계자는 "지침이 발표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피해는 업체의 몫

많은 산후도우미 업체가 이르면 이달 중순부터 지원금을 전혀 받지 못할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원금은 뒤늦게 내년에 예산이 확보된 뒤 지급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산후도우미들과 산후도우미 업체의 몫입니다. 한 산후도우미 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달에 도우미 1명 당 150만 원 정도를 줘야 하는데, 20명이면 3천만 원이에요. 9월부터 적어도 석 달 이상은 월급을 제 돈으로 메꿔야 해 1억 원 정도 대출을 신청했습니다.

막상 업체 운영을 중단할 수도 없는 게,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기 때문에 매출을 줄일 수도 없어요. 대출 이자는 계산도 안 해봤습니다."

(한 산후도우미 업체 대표)

앞서 규정이 바뀌며 지원이 허용된 산모의 가족들도 결국 업체에 등록해 돈을 받아야 하는데, 업체가 무너진다면 이들 역시 지원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산을 거의 다 써버린 만큼 마땅한 대책도 없는 만큼, 보건복지부 재정을 통해 해결하거나 자치단체의 저리 대출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규제를 풀고 속도감 있게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정책이건 가장 중요한 건 사업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좋은 사업 취지를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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