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래핑의 창시자 박경훈 ①

입력 2006.08.22 (15:45) 수정 2006.08.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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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2일.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고지대,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에 6만 관중이 들어찼다. 대한민국이 무려 32년 만에 밟아보는 무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아르헨티나하고 첫 경기를 하면서 느낀 긴장감. 애국가가 나왔을 때 그 찡한 마음. 그때 그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다른 때도 수도 없이 많이 애국가가 울렸지만 세계무대에서 그것도 월드컵에 뛰면서 애국가가 나왔을 때 느끼는 어딘가 찡한 마음은......
이건 내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해 혼신의 힘으로 한번 뛰어봐야겠다. 이게 바로 사명감과 국가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긴장하면서도 시합에 들어가면 다 잊게 되더라구요.”


대한민국 6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시발점에 해당되는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축구신동’ 마라도나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박경훈, 정용환, 김주성 등 신·구를 대표하는 최강의 선수들이 조화를 이루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5분이나 흘렀을까. 아크 정면 조금 먼 지점에서 아르헨티나가 프리킥을 얻어낸다. 공 앞에 서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현역 최고의 공격수 마라도나. 그가 달려들어 왼발로 강하게 후려차지만 수비벽을 형성한 한국 선수들의 몸에 맞고 다시 마라도나에게 공이 흐른다. 그는 지체 없이 전방의 공격수를 향해 헤딩 패스를 연결한다. 페널티에어리어 내 오른쪽에서 공을 받은 발다노.


그런데, 이럴 수가! 발다노를 마크해야 할 한국 수비수들이 모두 벽을 형성하고 있었던 터라 순간적으로 발다노의 주위에 빨간 유니폼의 한국 선수들이 없다. 지체 없이 날리는 오른발 슈팅.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의 발에서 뻗어나간 공이 골문 왼쪽 그물을 출렁인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허용한 선제골이었다.


32년 만에 진출한 월드컵의 대가치고는 너무 잔인했다.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같은 조에 편성된 것도 절망적인데 경기 시작 6분 만에 허용한 첫 골이라니. 선수들의 머리 속에는 문득 2경기 동안 16골을 허용하고 고국으로 씁쓸하게 돌아간 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스쳐 지나갔다.


실점을 허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르헨티나의 추가골이 터진다. 이번에는 루게리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다. 후방에서 올라온 프리킥 찬스에서 얻어낸 헤딩 추가골이었다. 한국은 차범근과 박창선이 중거리 슈팅을 시도하며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두드려 보지만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진입하기조차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게 전반이 마무리 되었다.


후반 들어 한국은 ‘진돗개’ 허정무에게 마라도나를 마크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마라도나는 페널티에어리어 오른쪽으로 파고들었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오연교 골키퍼의 손을 스친 공은 골문 앞에 서있던 발다노에게 연결 되었고 후반 시작 1분 만에 아르헨티나의 세 번째 골이 터진다.

“아무래도 마라도나랑 체격도 비슷하고 빠르다 보니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제가 전담 마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어요.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막상 시합에 나가서는 김평석 선수가 투입되어서 전담 마크를 하게 되었죠.
근데 두 골을 먹고 나니까 허정무 선배한테 마크를 맡기더라구요. 그 다음에는 김용세, 그리고 다시 허정무 선배가 막다가 30분 정도를 남기고 저한테 지시가 왔어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 처음부터 그에게 마라도나를 마크를 맡기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가 전담 마크를 시작한 무렵부터 한국은 대 반격을 시작해 마침내 후반 28분에는 박창선의 발에서 감격의 월드컵 첫 득점이 터지기에 이른다. 이마저도 그의 오버래핑에서부터 시작된 골이었다. 물론 이미 3점을 득점하여 승부의 추가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전 상황과의 객관적인 비교는 불가능 하겠지만 발 빠른 그에게 처음부터 전담 마크를 맡겼다면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같이 뛰어보면서 역시 세계적인 선수라는 것을 느꼈어요. 보편적으로 가슴 트래핑을 하고나면 공이 떨어짐과 동시에 트래핑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마라도나는 왼발잡이니까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칠 줄 알고 계산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떨어지기 전에 이미 무릎으로 치고 나가더라고.”


“그래서 파울밖에 할 수 없었어요.”


“멕시코가 얼마나 고지대에요. 2800미터 이런 고지대에서 뛰면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근데 마라도나 앞에 가면 일부러 힘든 척을 안 하려고 호흡을 자제하고 그랬었죠. 내가 힘든 것을 알면 얘가 더 치고 다닐 테니까. 앞에서는 힘든 척 안하고 마라도나가 저쪽가면 막 호흡하고. 그래서 서로가 힘든 때가 승부라는 것을 그 와중에 제가 절실히 느꼈어요.
바로 그럴 때 누가 한 발짝 더 먼저 뛰고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데 마라도나는 그걸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죽을 것 같이 헉헉대고 못 뛸 줄 알았는데 또 뛰는 거예요. 역시 스타선수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부분도 뛰어날뿐더러 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래서 마라도나가 그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고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수 있었겠죠.”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했던 이 남자. 변병주와 함께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준족으로 꼽히는 이 선수.


박경훈(46).


대한민국 오버래핑의 창시자이자 80년을 대표하는 준족의 윙백. 포항에서 9년 동안 활약하며 세 번의 우승을 이끌었고 88년에는 K-리그 MVP를 수상한 그가 ‘K-리그의 전설’ 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마냥 화려할 것만 같던 그의 축구 인생사는 의외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20년이 넘게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대표 선수 한 번 뽑히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A매치 출장 99경기에 빛나는 박경훈이 중학교 때까지 체계적인 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어요. 제가 원래 수유중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그 당시에 수유리라고 하면 굉장히 빈민가에 속하는 동네였어요. 우리 때만 해도 워낙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이기 때문에 축구공 하나 구하기 힘든 때였죠. 그래서 동네 축구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운동은 잘하다보니 태권도부도 했었고 육상 대회가 있으면 100m, 200m, 400m 계주, 넓이뛰기, 높이뛰기 등 여러 종목에 나가고 그랬죠. 그 것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고 대회 시작 전에 1주일 정도 연습하고 나가고 그랬었죠.


100m 달리기 시합에 나가면 워낙 체격이 작고 잘 못 먹다 보니까 50m 지점까지는 잘 달리는데 그 뒤에 힘이 떨어져서 4,5위로 들어오곤 했어요. 아무래도 달리기는 힘이 뒷받침 되어서 가속이 붙어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 한거죠. 그래서 멀리뛰기를 더 잘했었습니다. 멀리뛰기는 힘이 아니고 순간적인 스피드가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그 때는 운동보다는 그림이 좋다 보니까 그림을 주로 그렸어요. 그림 그리면 항상 상을 받아오곤 했었는데 돈이 없어서 큰 대회는 나가지도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켄트지 같은게 너무 비쌌으니까. 포스터 칼라나 붓 사기도 만만치 않아서 친구들 그림을 대신 그려주면 그 그림이 상을 받은 적도 있었죠.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예고를 갔어야 그림을 계속 그리는데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으니까요.”


단순히 평범한 삶으로 전락할 뻔 했던 그였지만 하늘은 재능 넘치는 박경훈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한 평생을 살면서 적어도 세 번의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터닝 포인트. 그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게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 때쯤 수유 중학교에 2회 아이들이 체육 선생님하고 서클 비슷한 축구팀을 만들었어요. 체육 선생님이 저더러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체육은 잘 했었는데 집에서 놀고 있다는 걸 아신 거죠. 그래도 전 그림이 더 좋아서 안하겠다고 했는데 후배들이 꼭 가야 된다고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시작을 했죠. 그 때가 여름방학 때였어요.


학교에서 훈련하면서 책상 붙이고 이불 가져와서 자고 그렇게 열흘 정도 연습을 해서 대회에 나갔습니다. 물론 중학교 대회였고 전 말하자면 부정 선수로 뛰었던 거죠. 경신고등학교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그 때 한홍기 선생님께서 경기를 보러 오셨어요. 근데 조그마한 애가 공을 통통 튀기면서 빨리 뛰어다니니까 축구를 잘하는 건 아닌데 가능성이 보였나 봐요. 저희 체육 선생님께 쟤 데리고 가고 싶다. 그러셨어요.”


한홍기 감독이라 하면 포철의 초대 감독이자 70년대 대표팀 감독까지 지낸 관록의 명장. 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단장의 자격으로 월드컵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런 명지도자가 아직 체계적인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박경훈에게 관심을 갖다니. 도대체 그가 가진 스피드와 잠재력은 얼마만큼 이란 말인가.


“대구에 있는 청구 고등학교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청구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포철에 입단하는 조건으로 데려가신다고 했는데 생전 서울 한 번 떠나 본적 없는 말하자면 서울 촌놈이 그 것도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제가 가족들과 떨어져서 대구까지 간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안 간다고 말씀 드렸더니 한홍기 선생님께서 직접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셨죠. 어머니는 고등학교도 못 보내서 안타까웠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해준다니까 승낙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대구를 오랜 시간동안 차타면서 어렵게 어렵게 가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차 오래타고 가는 것만 해도 해본 적이 없어서 큰 곤욕이었죠.


청구고등학교에 도착하니까 나이 세·네살 줄여서 덩치가 이렇게 큰 사람들이 다 거기 있는 거예요. 막상 가긴 갔는데 내가 축구를 할 줄을 알아야지. 그래서 그 때부터 미술은 접고 축구에 온통 인생을 걸어야겠다. 여기서 성공을 해서 그동안 못 살았던걸 만회를 해야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어요.”


“처음에는 인사이드 패스 밖에 못했어요. 드리블은 동네 축구를 했으니까 조금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슈팅 연습할 때 되면 몰래 뒤로 가서 공 줍고 그러니까 선배들이 너는 왜 그러냐고 혼내기도 많이 혼냈죠.


겁이 났어요 기본기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빠르고 순발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높이뛰기 선수로 나갈 정도로 점프력도 있었으니까 감독님이 수비를 시키시더라구요. 누구 한 명 잘하는 선수를 잡으라고 시키셨어요.


그 당시에 대륜고등학교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에서 우승하고 그랬을 때였어요. 대구에서 문민호 선배가 제일 잘했던 때였는데 한양대학교에 가서 같은 방을 쓰는데 문득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잘하는 선수였는데 어느 날 조그마한 애가 나타나더니 내가 뚫으면 다시 따라오고 내가 돌파했나 싶으면 다시 따라 와서 뺏어가더라고. 그게 바로 저였죠. 다른 부분은 약하더라도 워낙 순간적으로 빠르니까 저를 돌파하지 못한 거죠. 저는 돌파가 안 되니까 공 빼앗아서 바로 옆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하고. 처음에는 그렇게 게임을 뛰곤 했어요.”


당시 청구고에는 박경훈을 비롯하여 변병주, 백치수, 백종철 미래의 대표선수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1979년 전국고교축구대회 5관왕에 오를 정도로 절정의 활약을 보여주며 축구명문 청구고를 이끌었다. 하기사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준족인 변병주와 박경훈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팀이 누가 있단 말인가.


“1학년 때부터 스타팅으로 뛰긴 했지만 선배들에게 가려 있다가 2학년 말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제가 오버래핑을 하기 시작했죠. 옛날만 해도 수비는 무조건 뻥뻥 앞으로 걷어내기만 해야 한다는 상식이 지배적이었을 때였는데 달리기가 빠르다 보니까 오버래핑을 해서 팀에 큰 도움이 되었죠.”


축구를 시작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명문 청구고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박경훈.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을 휩쓴 그는 졸업과 동시에 포철에 입단하겠다는 한홍기 감독과의 약속을 어기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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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버래핑의 창시자 박경훈 ①
    • 입력 2006-08-22 15:45:44
    • 수정2006-08-22 16:07:27
    축구
1986년 6월 2일.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고지대,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에 6만 관중이 들어찼다. 대한민국이 무려 32년 만에 밟아보는 무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아르헨티나하고 첫 경기를 하면서 느낀 긴장감. 애국가가 나왔을 때 그 찡한 마음. 그때 그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다른 때도 수도 없이 많이 애국가가 울렸지만 세계무대에서 그것도 월드컵에 뛰면서 애국가가 나왔을 때 느끼는 어딘가 찡한 마음은...... 이건 내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해 혼신의 힘으로 한번 뛰어봐야겠다. 이게 바로 사명감과 국가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긴장하면서도 시합에 들어가면 다 잊게 되더라구요.” 대한민국 6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시발점에 해당되는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축구신동’ 마라도나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박경훈, 정용환, 김주성 등 신·구를 대표하는 최강의 선수들이 조화를 이루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5분이나 흘렀을까. 아크 정면 조금 먼 지점에서 아르헨티나가 프리킥을 얻어낸다. 공 앞에 서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현역 최고의 공격수 마라도나. 그가 달려들어 왼발로 강하게 후려차지만 수비벽을 형성한 한국 선수들의 몸에 맞고 다시 마라도나에게 공이 흐른다. 그는 지체 없이 전방의 공격수를 향해 헤딩 패스를 연결한다. 페널티에어리어 내 오른쪽에서 공을 받은 발다노. 그런데, 이럴 수가! 발다노를 마크해야 할 한국 수비수들이 모두 벽을 형성하고 있었던 터라 순간적으로 발다노의 주위에 빨간 유니폼의 한국 선수들이 없다. 지체 없이 날리는 오른발 슈팅.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의 발에서 뻗어나간 공이 골문 왼쪽 그물을 출렁인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허용한 선제골이었다. 32년 만에 진출한 월드컵의 대가치고는 너무 잔인했다.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같은 조에 편성된 것도 절망적인데 경기 시작 6분 만에 허용한 첫 골이라니. 선수들의 머리 속에는 문득 2경기 동안 16골을 허용하고 고국으로 씁쓸하게 돌아간 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스쳐 지나갔다. 실점을 허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르헨티나의 추가골이 터진다. 이번에는 루게리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다. 후방에서 올라온 프리킥 찬스에서 얻어낸 헤딩 추가골이었다. 한국은 차범근과 박창선이 중거리 슈팅을 시도하며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두드려 보지만 페널티에어리어 안으로 진입하기조차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게 전반이 마무리 되었다. 후반 들어 한국은 ‘진돗개’ 허정무에게 마라도나를 마크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마라도나는 페널티에어리어 오른쪽으로 파고들었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오연교 골키퍼의 손을 스친 공은 골문 앞에 서있던 발다노에게 연결 되었고 후반 시작 1분 만에 아르헨티나의 세 번째 골이 터진다. “아무래도 마라도나랑 체격도 비슷하고 빠르다 보니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제가 전담 마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어요.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막상 시합에 나가서는 김평석 선수가 투입되어서 전담 마크를 하게 되었죠. 근데 두 골을 먹고 나니까 허정무 선배한테 마크를 맡기더라구요. 그 다음에는 김용세, 그리고 다시 허정무 선배가 막다가 30분 정도를 남기고 저한테 지시가 왔어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 처음부터 그에게 마라도나를 마크를 맡기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가 전담 마크를 시작한 무렵부터 한국은 대 반격을 시작해 마침내 후반 28분에는 박창선의 발에서 감격의 월드컵 첫 득점이 터지기에 이른다. 이마저도 그의 오버래핑에서부터 시작된 골이었다. 물론 이미 3점을 득점하여 승부의 추가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전 상황과의 객관적인 비교는 불가능 하겠지만 발 빠른 그에게 처음부터 전담 마크를 맡겼다면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같이 뛰어보면서 역시 세계적인 선수라는 것을 느꼈어요. 보편적으로 가슴 트래핑을 하고나면 공이 떨어짐과 동시에 트래핑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마라도나는 왼발잡이니까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칠 줄 알고 계산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떨어지기 전에 이미 무릎으로 치고 나가더라고.” “그래서 파울밖에 할 수 없었어요.” “멕시코가 얼마나 고지대에요. 2800미터 이런 고지대에서 뛰면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근데 마라도나 앞에 가면 일부러 힘든 척을 안 하려고 호흡을 자제하고 그랬었죠. 내가 힘든 것을 알면 얘가 더 치고 다닐 테니까. 앞에서는 힘든 척 안하고 마라도나가 저쪽가면 막 호흡하고. 그래서 서로가 힘든 때가 승부라는 것을 그 와중에 제가 절실히 느꼈어요. 바로 그럴 때 누가 한 발짝 더 먼저 뛰고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데 마라도나는 그걸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죽을 것 같이 헉헉대고 못 뛸 줄 알았는데 또 뛰는 거예요. 역시 스타선수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부분도 뛰어날뿐더러 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래서 마라도나가 그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고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수 있었겠죠.”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했던 이 남자. 변병주와 함께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준족으로 꼽히는 이 선수. 박경훈(46). 대한민국 오버래핑의 창시자이자 80년을 대표하는 준족의 윙백. 포항에서 9년 동안 활약하며 세 번의 우승을 이끌었고 88년에는 K-리그 MVP를 수상한 그가 ‘K-리그의 전설’ 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마냥 화려할 것만 같던 그의 축구 인생사는 의외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20년이 넘게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대표 선수 한 번 뽑히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A매치 출장 99경기에 빛나는 박경훈이 중학교 때까지 체계적인 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어요. 제가 원래 수유중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그 당시에 수유리라고 하면 굉장히 빈민가에 속하는 동네였어요. 우리 때만 해도 워낙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이기 때문에 축구공 하나 구하기 힘든 때였죠. 그래서 동네 축구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운동은 잘하다보니 태권도부도 했었고 육상 대회가 있으면 100m, 200m, 400m 계주, 넓이뛰기, 높이뛰기 등 여러 종목에 나가고 그랬죠. 그 것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고 대회 시작 전에 1주일 정도 연습하고 나가고 그랬었죠. 100m 달리기 시합에 나가면 워낙 체격이 작고 잘 못 먹다 보니까 50m 지점까지는 잘 달리는데 그 뒤에 힘이 떨어져서 4,5위로 들어오곤 했어요. 아무래도 달리기는 힘이 뒷받침 되어서 가속이 붙어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 한거죠. 그래서 멀리뛰기를 더 잘했었습니다. 멀리뛰기는 힘이 아니고 순간적인 스피드가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그 때는 운동보다는 그림이 좋다 보니까 그림을 주로 그렸어요. 그림 그리면 항상 상을 받아오곤 했었는데 돈이 없어서 큰 대회는 나가지도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켄트지 같은게 너무 비쌌으니까. 포스터 칼라나 붓 사기도 만만치 않아서 친구들 그림을 대신 그려주면 그 그림이 상을 받은 적도 있었죠.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예고를 갔어야 그림을 계속 그리는데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으니까요.” 단순히 평범한 삶으로 전락할 뻔 했던 그였지만 하늘은 재능 넘치는 박경훈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한 평생을 살면서 적어도 세 번의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터닝 포인트. 그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게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 때쯤 수유 중학교에 2회 아이들이 체육 선생님하고 서클 비슷한 축구팀을 만들었어요. 체육 선생님이 저더러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체육은 잘 했었는데 집에서 놀고 있다는 걸 아신 거죠. 그래도 전 그림이 더 좋아서 안하겠다고 했는데 후배들이 꼭 가야 된다고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시작을 했죠. 그 때가 여름방학 때였어요. 학교에서 훈련하면서 책상 붙이고 이불 가져와서 자고 그렇게 열흘 정도 연습을 해서 대회에 나갔습니다. 물론 중학교 대회였고 전 말하자면 부정 선수로 뛰었던 거죠. 경신고등학교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그 때 한홍기 선생님께서 경기를 보러 오셨어요. 근데 조그마한 애가 공을 통통 튀기면서 빨리 뛰어다니니까 축구를 잘하는 건 아닌데 가능성이 보였나 봐요. 저희 체육 선생님께 쟤 데리고 가고 싶다. 그러셨어요.” 한홍기 감독이라 하면 포철의 초대 감독이자 70년대 대표팀 감독까지 지낸 관록의 명장. 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단장의 자격으로 월드컵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런 명지도자가 아직 체계적인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박경훈에게 관심을 갖다니. 도대체 그가 가진 스피드와 잠재력은 얼마만큼 이란 말인가. “대구에 있는 청구 고등학교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청구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포철에 입단하는 조건으로 데려가신다고 했는데 생전 서울 한 번 떠나 본적 없는 말하자면 서울 촌놈이 그 것도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제가 가족들과 떨어져서 대구까지 간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안 간다고 말씀 드렸더니 한홍기 선생님께서 직접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셨죠. 어머니는 고등학교도 못 보내서 안타까웠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해준다니까 승낙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대구를 오랜 시간동안 차타면서 어렵게 어렵게 가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차 오래타고 가는 것만 해도 해본 적이 없어서 큰 곤욕이었죠. 청구고등학교에 도착하니까 나이 세·네살 줄여서 덩치가 이렇게 큰 사람들이 다 거기 있는 거예요. 막상 가긴 갔는데 내가 축구를 할 줄을 알아야지. 그래서 그 때부터 미술은 접고 축구에 온통 인생을 걸어야겠다. 여기서 성공을 해서 그동안 못 살았던걸 만회를 해야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어요.” “처음에는 인사이드 패스 밖에 못했어요. 드리블은 동네 축구를 했으니까 조금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슈팅 연습할 때 되면 몰래 뒤로 가서 공 줍고 그러니까 선배들이 너는 왜 그러냐고 혼내기도 많이 혼냈죠. 겁이 났어요 기본기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빠르고 순발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높이뛰기 선수로 나갈 정도로 점프력도 있었으니까 감독님이 수비를 시키시더라구요. 누구 한 명 잘하는 선수를 잡으라고 시키셨어요. 그 당시에 대륜고등학교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에서 우승하고 그랬을 때였어요. 대구에서 문민호 선배가 제일 잘했던 때였는데 한양대학교에 가서 같은 방을 쓰는데 문득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잘하는 선수였는데 어느 날 조그마한 애가 나타나더니 내가 뚫으면 다시 따라오고 내가 돌파했나 싶으면 다시 따라 와서 뺏어가더라고. 그게 바로 저였죠. 다른 부분은 약하더라도 워낙 순간적으로 빠르니까 저를 돌파하지 못한 거죠. 저는 돌파가 안 되니까 공 빼앗아서 바로 옆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하고. 처음에는 그렇게 게임을 뛰곤 했어요.” 당시 청구고에는 박경훈을 비롯하여 변병주, 백치수, 백종철 미래의 대표선수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1979년 전국고교축구대회 5관왕에 오를 정도로 절정의 활약을 보여주며 축구명문 청구고를 이끌었다. 하기사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준족인 변병주와 박경훈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팀이 누가 있단 말인가. “1학년 때부터 스타팅으로 뛰긴 했지만 선배들에게 가려 있다가 2학년 말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제가 오버래핑을 하기 시작했죠. 옛날만 해도 수비는 무조건 뻥뻥 앞으로 걷어내기만 해야 한다는 상식이 지배적이었을 때였는데 달리기가 빠르다 보니까 오버래핑을 해서 팀에 큰 도움이 되었죠.” 축구를 시작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명문 청구고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박경훈.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을 휩쓴 그는 졸업과 동시에 포철에 입단하겠다는 한홍기 감독과의 약속을 어기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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