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동물만 위하자는 게 아닙니다

입력 2019.09.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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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늘 벽에 부딪힐 것을 감수해야 한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도축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아예 잡아먹지를 말아야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수백만 년 이어져 온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건 모순이지." "주변에 불우한 이웃이 얼마나 많아? 동물에 들일 비용이 있으면 사람부터 살려야지." 반론을 들자면 끝이 없다. "모피를 입지 말자고?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소가죽 가방은?" "동물 실험을 금지하자고? 거기서 개발된 약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는데도?"

동물권에 관한 한 인류는 모순덩어리인 듯 보인다. 다큐멘터리 '동물, 원'(5일 개봉)도 그 사례 중 하나일 수 있다. 청주동물원 사람들과 그곳의 동물들 이야기다. 이곳의 수의사와 사육사들은 자신이 맡은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할수록 딜레마를 느낀다. 이곳의 한 수의사는 말한다. "조그만 우리에 가둬놓고 먹지도 않는 음식인데 집어던져서 먹게 하고 탈나게 하고, 동물들 입장에서 동물원은 필요가 없다고 봐요."

당연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느끼는 데서 출발

촬영 중 태어난 아기물범 '초롱이'는 물에 있다 뭍으로 올라오고 싶어도 포장된 바닥이 미끄러워 매번 안간힘이다. 직원들이 24시간 지켜보며 도와야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표범 '직지'는 몇시간이고 우리 안을 맴돈다. 달리는 본성을 빼앗긴 대신 정신병을 얻은 것이다. 직지를 위해 통행로 하나 만들어주는 데 예산확보에 여간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다. 그래서 '동물, 원'이 동물원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눈앞의 현실에 집중한다. 이곳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태어난 생명체들이 본성과 다른 환경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그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동물 구경을 당연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1794년 프랑스 파리에서 문을 연 '메나제리 드 자뎅'이다. 동물권 개념이 없던 시절 '공원을 거닐며 동물 구경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200년 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20세기 말부터 파리와 베를린, 취리히, 뉴욕의 동물원들은 전시 중심에서 생태환경 중심으로 그 구조를 전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 동물들 각자의 본성에 맞도록 시설을 바꿔주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가능한 한 지켜주면서 사육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코끼리 등 대형 동물의 신규 매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단계적 축소 과정을 밟고 있다. 이들은 모순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기보다 한 걸음씩 나아간다.

취향의 문제 아닌 권리의 문제

서구에서 동물권 인식이 출발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동물해방'(1975)은 동물권 운동을 촉발시킨 도화선이었다. 인종 차별,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회 움직임이 폭넓어진 당시, 종(種) 차별에도 함께 반대해야 할 필요를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싱어는 특히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동물 애호'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짚었다. 인종이나 성 평등을 주장한다고 해서 '흑인 애호가' 또는 '여성 애호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애호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애호는 취향이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하지만 권리의 문제는 호불호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이다. 이러한 논증은 당시 '동물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오가던 동물권 논의를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2015)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2015)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빼앗아 그 고기를 먹는다.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황윤 감독은 돼지농장을 취재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게 된다. 황 감독의 남편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돼지의 권리보다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영화는 동물복지를 실천하고 있는 돼지농장과 그렇지 않은 공장식 축사를 비교 취재하면서 인간의 식탁을 위해 고통받는 돼지들을 들여다본다. 공장식 축사 주인은 "우리 축사는 공장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 동물복지 얘기가 많은데 그러면 고기 먹지 말아야 된다"고 말한다. 수요가 있는 만큼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란 얘기다. 황 감독 남편이나 축사 주인의 말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인다.

동물원의 역사는 200년 전 얘기지만 축산업의 역사는 수천 년을 헤아린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걱정하기 시작한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의 관습과 맞서는 일이다. 딜레마에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다. 유럽연합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소와 돼지, 닭들이 축사에서 다리를 뻗고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 불법이다. 한국에선 동물복지 인증 돼지 농장이 전체의 0.2%, 젖소 농장은 0.1%에 불과하다(농림축산식품부 2018년 말 자료). 스위스에서는 지난해부터 살아있는 가재를 끓는 물에 넣어 요리하면 불법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랍스터 먹는 데도 가재 권리 따져야 하나. 그렇게 따지면 풀만 뜯어야지'라며 코웃음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약자를 위한 진보, 각 분야에서 함께 진행되는 것"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지심리학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통해 이런 논란에 대해 한 줄기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70년대 동물권 논의가 확산한 이후 동물 학대 건수가 급감하고, 이 궤적과 함께 성차별, 아동 학대, 인종 혐오 범죄가 함께 줄어들고 있음을 방대한 자료와 함께 보여준다. 그러면서 "소수인종, 여성, 아동, 동성애자, 동물을 위한 진보는 함께 진행되었다. 우리는 감각 있는 다른 존재들의 처지에 스스로를 대입해봄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고려하게 된다"고 썼다.

예컨대 바닷가재에게는 전신에 신경망이 뻗어있어서 끓는 물에 산 채로 집어넣으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 죽어간다. 이 사실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이후 그 고통을 금지하도록 법을 개정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된다. "우리 사회는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알고도 방치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라면 성차별, 인종 혐오, 아동 폭력을 놔둘 리 없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이다. 폭력과 야만이 어느 한 분야에서만 개선되는 게 아니라는 핑커의 주장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한 사회가 동물권을 보장하는 정도는 그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가장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사람이 먼저'라며 눈앞에서 고통받는 동물을 방치해선 안 되는 이유다.

[대문사진 출처 : 다큐멘터리 '동물, 원'/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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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권, 동물만 위하자는 게 아닙니다
    • 입력 2019-09-08 07:00:32
    취재K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늘 벽에 부딪힐 것을 감수해야 한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도축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아예 잡아먹지를 말아야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수백만 년 이어져 온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건 모순이지." "주변에 불우한 이웃이 얼마나 많아? 동물에 들일 비용이 있으면 사람부터 살려야지." 반론을 들자면 끝이 없다. "모피를 입지 말자고?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소가죽 가방은?" "동물 실험을 금지하자고? 거기서 개발된 약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는데도?"

동물권에 관한 한 인류는 모순덩어리인 듯 보인다. 다큐멘터리 '동물, 원'(5일 개봉)도 그 사례 중 하나일 수 있다. 청주동물원 사람들과 그곳의 동물들 이야기다. 이곳의 수의사와 사육사들은 자신이 맡은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할수록 딜레마를 느낀다. 이곳의 한 수의사는 말한다. "조그만 우리에 가둬놓고 먹지도 않는 음식인데 집어던져서 먹게 하고 탈나게 하고, 동물들 입장에서 동물원은 필요가 없다고 봐요."

당연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느끼는 데서 출발

촬영 중 태어난 아기물범 '초롱이'는 물에 있다 뭍으로 올라오고 싶어도 포장된 바닥이 미끄러워 매번 안간힘이다. 직원들이 24시간 지켜보며 도와야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표범 '직지'는 몇시간이고 우리 안을 맴돈다. 달리는 본성을 빼앗긴 대신 정신병을 얻은 것이다. 직지를 위해 통행로 하나 만들어주는 데 예산확보에 여간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다. 그래서 '동물, 원'이 동물원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눈앞의 현실에 집중한다. 이곳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태어난 생명체들이 본성과 다른 환경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그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동물 구경을 당연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1794년 프랑스 파리에서 문을 연 '메나제리 드 자뎅'이다. 동물권 개념이 없던 시절 '공원을 거닐며 동물 구경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200년 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20세기 말부터 파리와 베를린, 취리히, 뉴욕의 동물원들은 전시 중심에서 생태환경 중심으로 그 구조를 전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 동물들 각자의 본성에 맞도록 시설을 바꿔주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가능한 한 지켜주면서 사육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코끼리 등 대형 동물의 신규 매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단계적 축소 과정을 밟고 있다. 이들은 모순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기보다 한 걸음씩 나아간다.

취향의 문제 아닌 권리의 문제

서구에서 동물권 인식이 출발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동물해방'(1975)은 동물권 운동을 촉발시킨 도화선이었다. 인종 차별,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회 움직임이 폭넓어진 당시, 종(種) 차별에도 함께 반대해야 할 필요를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싱어는 특히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동물 애호'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짚었다. 인종이나 성 평등을 주장한다고 해서 '흑인 애호가' 또는 '여성 애호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애호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애호는 취향이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하지만 권리의 문제는 호불호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이다. 이러한 논증은 당시 '동물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오가던 동물권 논의를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2015)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빼앗아 그 고기를 먹는다.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황윤 감독은 돼지농장을 취재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게 된다. 황 감독의 남편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돼지의 권리보다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영화는 동물복지를 실천하고 있는 돼지농장과 그렇지 않은 공장식 축사를 비교 취재하면서 인간의 식탁을 위해 고통받는 돼지들을 들여다본다. 공장식 축사 주인은 "우리 축사는 공장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 동물복지 얘기가 많은데 그러면 고기 먹지 말아야 된다"고 말한다. 수요가 있는 만큼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란 얘기다. 황 감독 남편이나 축사 주인의 말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인다.

동물원의 역사는 200년 전 얘기지만 축산업의 역사는 수천 년을 헤아린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걱정하기 시작한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의 관습과 맞서는 일이다. 딜레마에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다. 유럽연합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소와 돼지, 닭들이 축사에서 다리를 뻗고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 불법이다. 한국에선 동물복지 인증 돼지 농장이 전체의 0.2%, 젖소 농장은 0.1%에 불과하다(농림축산식품부 2018년 말 자료). 스위스에서는 지난해부터 살아있는 가재를 끓는 물에 넣어 요리하면 불법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랍스터 먹는 데도 가재 권리 따져야 하나. 그렇게 따지면 풀만 뜯어야지'라며 코웃음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약자를 위한 진보, 각 분야에서 함께 진행되는 것"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지심리학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통해 이런 논란에 대해 한 줄기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70년대 동물권 논의가 확산한 이후 동물 학대 건수가 급감하고, 이 궤적과 함께 성차별, 아동 학대, 인종 혐오 범죄가 함께 줄어들고 있음을 방대한 자료와 함께 보여준다. 그러면서 "소수인종, 여성, 아동, 동성애자, 동물을 위한 진보는 함께 진행되었다. 우리는 감각 있는 다른 존재들의 처지에 스스로를 대입해봄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고려하게 된다"고 썼다.

예컨대 바닷가재에게는 전신에 신경망이 뻗어있어서 끓는 물에 산 채로 집어넣으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 죽어간다. 이 사실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이후 그 고통을 금지하도록 법을 개정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된다. "우리 사회는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알고도 방치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라면 성차별, 인종 혐오, 아동 폭력을 놔둘 리 없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이다. 폭력과 야만이 어느 한 분야에서만 개선되는 게 아니라는 핑커의 주장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한 사회가 동물권을 보장하는 정도는 그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가장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사람이 먼저'라며 눈앞에서 고통받는 동물을 방치해선 안 되는 이유다.

[대문사진 출처 : 다큐멘터리 '동물, 원'/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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