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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여순사건 재심 판사의 울먹임 “더 일찍 선언하지 못해…”
입력 2020.01.22 (17:53) 수정 2020.01.22 (18:01) 취재후
[취재후] 여순사건 재심 판사의 울먹임 “더 일찍 선언하지 못해…”
판사의 눈물, 방청객들의 박수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던 재판장이 울먹였습니다. 정적이 흐른 것은 잠시였습니다. 서 있을 틈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흐느끼는 소리도 군데군데에서 들렸습니다. 방청객의 말이 허락되지 않은 재판정에서 나온, 무언의 응원과 공감이었습니다. 박수와 눈물이 뒤섞인 공간에서 판사는 낭독을 계속했습니다.

"장환봉 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70여 년이 지나서야 잘못됐다고 선언하게 됐는데, 더 일찍 명예로움을 선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여순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였습니다. 판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를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쁘게 수첩에 메모를 하느라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생경했습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 2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묵례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방청석의 울음소리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방청객 가운데는 여순사건 때 가족을 잃은 이들도 있었고, 그들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봐 온 이웃들도 있었습니다. 조금 전보다도 더 큰 박수와 눈물을 뒤로하고 판사들은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손을 잡고, 끌어안고,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휠체어를 탄 98살 노모와 75살 딸은 한참 동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 당시 군사재판에서 사형당한 민간인 피고인 고(故) 장환봉 씨에 대해, 72년 만에 무죄를 선고한 재판의 풍경이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기약 없는 기다림

72년, 누군가가 일생을 시작했다 마감할 시간. 그동안 장환봉 씨에게 국가가 붙인 또 다른 이름은 '내란 사형수'였습니다. 장 씨는 순천역에 근무하는 29살의 철도원이자 어린 두 딸의 아버지였습니다. 장 씨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건, 여순사건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올라오면서부터였습니다. 봉기를 금세 잠재운 진압군은 장 씨가 반란에 가담했다고 의심했습니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가 갑자기 연행됐고, 3주 만에 반란 가담자로 분류돼 처형됐습니다.

비극이 일어났을 때 큰딸 장경자 씨는 세 살이었습니다. 여름이면 손수 부채질해 주던 다정한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아버지가 '콩을 팔러 갔다'며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조금 더 철이 들자 어머니는 여순 '반란'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만 말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응어리가 돼 항상 마음에 고여 있었습니다. 나이 쉰이 넘고 유족회가 생긴 20여 년 전부터, 경자 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경자 씨는 사람을 만나고 온갖 문서를 뒤지다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 있는 재판 기록인 '판결집행명령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이를 근거로 2011년 10월, 다시 재판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판결을 바로잡는 건 정말 어려웠습니다. 1심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나왔지만, 검찰은 불복했습니다. 마찬가지 결론이 난 2심에도 검찰은 다시 항고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지난해 3월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까지는 7년 반이 걸렸습니다.


험난한 재판 끝에 얻어낸 72년 만의 무죄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재판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의 사형 선고에 대해 다시 판단해야 하는데, 죄목은 무엇이었으며 선고의 근거는 어떤 것이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여순사건 재심을 맡은 광주지검 순천지청 검사들이 국방부 등과 함께 TF팀까지 꾸려 석 달 넘게 온갖 기관을 뒤졌지만, 재심 청구의 근거가 됐던 '판결집행명령서'를 제외한 다른 재판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검찰의 자세였습니다. 검찰은 첫 재판에서 '여순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사법적 책무를 부여받았다'고 밝힌 대로, 70여 년 전 군사재판의 실체를 하나씩 찾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공소사실을 복원했습니다. 과거 군사재판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입증하는 증인도 불렀습니다. 변호인과 시민단체는 당시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새롭게 발굴하고, 사건 목격자들을 찾아내 힘을 더했습니다. 결국 지난달 23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장 씨가 내란에 가담한 증거가 없는 데다 군사재판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있다며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7차례의 재판에서 여러 차례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뜻을 밝혔던 재판부는, 결국 선고공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며칠 사이에 수백 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여순사건의 군사재판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며, 장 씨의 내란 혐의에 대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순사건 피해자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고 명예를 회복한 판결이었습니다. 경자 씨를 비롯한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무죄 선고에 뜨거운 환영의 박수를 보낸 이유였습니다.


눈물의 의미는 '미안함'

무죄 판결의 역사적 의미는 크지만, 여순사건의 해결까지는 여전히 머나먼 길이 남아 있습니다. 당장 이번 재심 절차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자 씨와 함께 재심을 청구했던 유족 2명은, 앞서 말한 것처럼 8년 가까운 법정 싸움 도중에 모두 숨졌습니다. 재심 청구인들이 숨지면서 해당 사건의 소송 절차는 자동으로 종료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명예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재심에 참여하지 못한 수많은 유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직접 소송을 내고 기록을 찾아야 합니다. 장환봉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이 얽히고설킨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겁니다.

재판장의 뜨거운 눈물에 담긴 감정은 그 '미안함'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은 재심을 이어가면서 억울하게 부모를 잃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지역민의 아픔을 직시했을 겁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라는 사법적 책무를 짊어지고 노력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 1명에 대한 무죄 판결이었다는 점도 깨달았을 겁니다. 이례적으로 재판장이 판결문에 '여론(餘論)', 즉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그 때문일 겁니다.

"무고한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회복을 위하여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너무나도 멀고도 험난합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 이상 밟지 않으시고,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 절차를 통하여 구제받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순사건 재심 판결문 中)

눈물과 진심이 담긴 재판장의 말처럼, 국가폭력으로 삶이 철저히 파괴된 여순사건 피해자들과 유족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더욱 따뜻한 시선으로 해결책을 마련하길 기대합니다.
  • [취재후] 여순사건 재심 판사의 울먹임 “더 일찍 선언하지 못해…”
    • 입력 2020.01.22 (17:53)
    • 수정 2020.01.22 (18:01)
    취재후
[취재후] 여순사건 재심 판사의 울먹임 “더 일찍 선언하지 못해…”
판사의 눈물, 방청객들의 박수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던 재판장이 울먹였습니다. 정적이 흐른 것은 잠시였습니다. 서 있을 틈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흐느끼는 소리도 군데군데에서 들렸습니다. 방청객의 말이 허락되지 않은 재판정에서 나온, 무언의 응원과 공감이었습니다. 박수와 눈물이 뒤섞인 공간에서 판사는 낭독을 계속했습니다.

"장환봉 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70여 년이 지나서야 잘못됐다고 선언하게 됐는데, 더 일찍 명예로움을 선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여순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였습니다. 판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를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쁘게 수첩에 메모를 하느라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생경했습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 2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묵례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방청석의 울음소리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방청객 가운데는 여순사건 때 가족을 잃은 이들도 있었고, 그들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봐 온 이웃들도 있었습니다. 조금 전보다도 더 큰 박수와 눈물을 뒤로하고 판사들은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손을 잡고, 끌어안고,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휠체어를 탄 98살 노모와 75살 딸은 한참 동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1948년 11월 여순사건 당시 군사재판에서 사형당한 민간인 피고인 고(故) 장환봉 씨에 대해, 72년 만에 무죄를 선고한 재판의 풍경이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기약 없는 기다림

72년, 누군가가 일생을 시작했다 마감할 시간. 그동안 장환봉 씨에게 국가가 붙인 또 다른 이름은 '내란 사형수'였습니다. 장 씨는 순천역에 근무하는 29살의 철도원이자 어린 두 딸의 아버지였습니다. 장 씨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건, 여순사건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올라오면서부터였습니다. 봉기를 금세 잠재운 진압군은 장 씨가 반란에 가담했다고 의심했습니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가 갑자기 연행됐고, 3주 만에 반란 가담자로 분류돼 처형됐습니다.

비극이 일어났을 때 큰딸 장경자 씨는 세 살이었습니다. 여름이면 손수 부채질해 주던 다정한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아버지가 '콩을 팔러 갔다'며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조금 더 철이 들자 어머니는 여순 '반란'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만 말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응어리가 돼 항상 마음에 고여 있었습니다. 나이 쉰이 넘고 유족회가 생긴 20여 년 전부터, 경자 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경자 씨는 사람을 만나고 온갖 문서를 뒤지다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 있는 재판 기록인 '판결집행명령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이를 근거로 2011년 10월, 다시 재판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판결을 바로잡는 건 정말 어려웠습니다. 1심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나왔지만, 검찰은 불복했습니다. 마찬가지 결론이 난 2심에도 검찰은 다시 항고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지난해 3월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까지는 7년 반이 걸렸습니다.


험난한 재판 끝에 얻어낸 72년 만의 무죄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재판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의 사형 선고에 대해 다시 판단해야 하는데, 죄목은 무엇이었으며 선고의 근거는 어떤 것이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여순사건 재심을 맡은 광주지검 순천지청 검사들이 국방부 등과 함께 TF팀까지 꾸려 석 달 넘게 온갖 기관을 뒤졌지만, 재심 청구의 근거가 됐던 '판결집행명령서'를 제외한 다른 재판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검찰의 자세였습니다. 검찰은 첫 재판에서 '여순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사법적 책무를 부여받았다'고 밝힌 대로, 70여 년 전 군사재판의 실체를 하나씩 찾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공소사실을 복원했습니다. 과거 군사재판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입증하는 증인도 불렀습니다. 변호인과 시민단체는 당시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새롭게 발굴하고, 사건 목격자들을 찾아내 힘을 더했습니다. 결국 지난달 23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장 씨가 내란에 가담한 증거가 없는 데다 군사재판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있다며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7차례의 재판에서 여러 차례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뜻을 밝혔던 재판부는, 결국 선고공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며칠 사이에 수백 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여순사건의 군사재판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며, 장 씨의 내란 혐의에 대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순사건 피해자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고 명예를 회복한 판결이었습니다. 경자 씨를 비롯한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무죄 선고에 뜨거운 환영의 박수를 보낸 이유였습니다.


눈물의 의미는 '미안함'

무죄 판결의 역사적 의미는 크지만, 여순사건의 해결까지는 여전히 머나먼 길이 남아 있습니다. 당장 이번 재심 절차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자 씨와 함께 재심을 청구했던 유족 2명은, 앞서 말한 것처럼 8년 가까운 법정 싸움 도중에 모두 숨졌습니다. 재심 청구인들이 숨지면서 해당 사건의 소송 절차는 자동으로 종료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명예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재심에 참여하지 못한 수많은 유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직접 소송을 내고 기록을 찾아야 합니다. 장환봉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이 얽히고설킨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겁니다.

재판장의 뜨거운 눈물에 담긴 감정은 그 '미안함'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은 재심을 이어가면서 억울하게 부모를 잃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지역민의 아픔을 직시했을 겁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라는 사법적 책무를 짊어지고 노력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 1명에 대한 무죄 판결이었다는 점도 깨달았을 겁니다. 이례적으로 재판장이 판결문에 '여론(餘論)', 즉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그 때문일 겁니다.

"무고한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회복을 위하여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너무나도 멀고도 험난합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 이상 밟지 않으시고,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 절차를 통하여 구제받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순사건 재심 판결문 中)

눈물과 진심이 담긴 재판장의 말처럼, 국가폭력으로 삶이 철저히 파괴된 여순사건 피해자들과 유족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더욱 따뜻한 시선으로 해결책을 마련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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