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벽에 가로막힌 2세 산재…본인 탓만 하는 부모 노동자들

입력 2020.11.27 (15:54) 수정 2020.11.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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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근로자 본인이 아닌 태아에 대해서도 산업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은 10년 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산재 신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주의료원 소속 간호사 4명이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요양급여를 신청했는데 반려됐습니다.

공단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에서 1심 인정, 2심 불인정에 이어 대법원은 산모의 업무로 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산재보험법상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분들 외에도 일하던 환경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아이가 아픈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부모들이 더 있습니다.

왼쪽: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김희정 씨/ 오른쪽: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LCD를 만들었던 A 씨.왼쪽: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김희정 씨/ 오른쪽: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LCD를 만들었던 A 씨.

■반도체·LCD 공장서 일하다 낳은 아픈 아이들

김희정 씨는 1995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약을 먹어야 했고 두 살도 안 돼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완치가 없다는 병을 진단 받아 지금도 매달 병원에 다니는데 혹시 상태가 나빠질까봐 매번 가슴을 졸여야 합니다.

김 씨는 반도체에 들어가는 전기회로가 새겨진 유리판인 '마스크'를 만드는 공정을 담당했는데요. 임신 중에도 유해물질을 다뤄왔다고 말합니다.

특히 화학물질을 교체하는 작업은 냄새가 굉장히 독했고 이 작업을 수년 동안 해 왔으니 혹시 김 씨가 일했던 업무 환경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김 씨는 임신 중에는 이 작업이 너무 힘들어서 후배들에게 몇 번 부탁한 적도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A 씨는 2010년부터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다행히 한쪽 눈은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상황이 나빠지고 있고, 보청기를 끼고 생활합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A 씨는 "설마"했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자신이 백혈병 진단을 받자 근무 환경 때문에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A 씨는 LCD공정에서 유해가스를 이용해 기판에 회로를 새기는 작업을 담당했는데요. 아이를 가졌을 당시 유해가스 잔여물을 청소하는 업무를 1년 동안 혼자 도맡았습니다.

숨을 들이 쉴 수도 없고 내쉴 수도 없는 상태, 당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근무 환경이었습니다. A 씨는 주로 담당하던 유지보수 작업에서도 유해가스를 접해야했고, 유해가스 누출 알람이 울리면 고치러 뛰어가는 것도 A 씨였습니다.

■발암성물질·생식독성물질 노출 영향 있나

반도체공정과 LCD공정에서 생식독성물질 등 유해물질 노출과 그 건강 영향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얘기입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 길라잡이"를 보면 김 씨가 담당했던 공정에서 다루는 물질들이 생식기계에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A 씨가 담당한 공정 역시 "LCD 제조업 작업환경관리 매뉴얼 개발 연구"에서 생식독성물질을 사용한다고 나와 있고, 다만 유해물질 종류에 따라 건강 영향을 급성 중독 위험, 장시간 노출시 뼈가 약해질 수 있고, 소화기 장애, 중추신경계 억제증상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산재 신청이 되더라도 난관은 예상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내놓은 2018년 "생식독성물질 취급 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관리 중인 생식독성 물질의 수는 유통되는 화학물질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특별관리물질에 포함되지 않는 생식독성물질은 직업환경측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파악조치 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일하면서 생식독성물질인지도 모르고 접한 뒤 아이 질환까지 이어진 노동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 산재 신청을 하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역학조사를 벌이는데 조사에서 산업안전보건법에 빠져 있는 물질들을 고려하지 않게 될 겁니다.

■본인 탓만 할 수밖에 없는 부모 노동자들...."산재 신청이라도 가능하길"

현재는 아이 질환과 관련해서는 산재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산재보험법상 산재 급여는 근로자 본인만 해당하기 때문에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 적용 대상이 확대되야 가능하다는게 근로복지공단의 입장입니다.

제주의료원 판결 이후 개정 작업에 착수했고, 21대 국회 들어 관련 법안만 3개나 발의된 상태입니다.

고용노동부는 태아 산재를 인정하고 있는 독일 제도 용역 연구를 이미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산재보험법 개정안 적용 대상과 보상 범위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국회 입법 과정에서 정부 의견을 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희정 씨는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을 자꾸 탓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은 여성 노동자들이 임신하면 일을 그만두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때 일을 그만뒀더라면 아이가 괜찮지 않았을까 후회합니다.

김 씨는 "왜 나를 아프게 낳았어"라고 묻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A 씨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예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건강도 잃고 아이의 건강도 좋지 못한 상황.

강하게 업무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기에 산재를 신청해서 조사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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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벽에 가로막힌 2세 산재…본인 탓만 하는 부모 노동자들
    • 입력 2020-11-27 15:54:55
    • 수정2020-11-27 16:42:22
    취재후·사건후

지난 4월, 근로자 본인이 아닌 태아에 대해서도 산업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은 10년 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산재 신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주의료원 소속 간호사 4명이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요양급여를 신청했는데 반려됐습니다.

공단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에서 1심 인정, 2심 불인정에 이어 대법원은 산모의 업무로 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산재보험법상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분들 외에도 일하던 환경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아이가 아픈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부모들이 더 있습니다.

왼쪽: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김희정 씨/ 오른쪽: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LCD를 만들었던 A 씨.
■반도체·LCD 공장서 일하다 낳은 아픈 아이들

김희정 씨는 1995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약을 먹어야 했고 두 살도 안 돼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완치가 없다는 병을 진단 받아 지금도 매달 병원에 다니는데 혹시 상태가 나빠질까봐 매번 가슴을 졸여야 합니다.

김 씨는 반도체에 들어가는 전기회로가 새겨진 유리판인 '마스크'를 만드는 공정을 담당했는데요. 임신 중에도 유해물질을 다뤄왔다고 말합니다.

특히 화학물질을 교체하는 작업은 냄새가 굉장히 독했고 이 작업을 수년 동안 해 왔으니 혹시 김 씨가 일했던 업무 환경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김 씨는 임신 중에는 이 작업이 너무 힘들어서 후배들에게 몇 번 부탁한 적도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A 씨는 2010년부터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다행히 한쪽 눈은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상황이 나빠지고 있고, 보청기를 끼고 생활합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A 씨는 "설마"했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자신이 백혈병 진단을 받자 근무 환경 때문에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A 씨는 LCD공정에서 유해가스를 이용해 기판에 회로를 새기는 작업을 담당했는데요. 아이를 가졌을 당시 유해가스 잔여물을 청소하는 업무를 1년 동안 혼자 도맡았습니다.

숨을 들이 쉴 수도 없고 내쉴 수도 없는 상태, 당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근무 환경이었습니다. A 씨는 주로 담당하던 유지보수 작업에서도 유해가스를 접해야했고, 유해가스 누출 알람이 울리면 고치러 뛰어가는 것도 A 씨였습니다.

■발암성물질·생식독성물질 노출 영향 있나

반도체공정과 LCD공정에서 생식독성물질 등 유해물질 노출과 그 건강 영향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얘기입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 길라잡이"를 보면 김 씨가 담당했던 공정에서 다루는 물질들이 생식기계에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A 씨가 담당한 공정 역시 "LCD 제조업 작업환경관리 매뉴얼 개발 연구"에서 생식독성물질을 사용한다고 나와 있고, 다만 유해물질 종류에 따라 건강 영향을 급성 중독 위험, 장시간 노출시 뼈가 약해질 수 있고, 소화기 장애, 중추신경계 억제증상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산재 신청이 되더라도 난관은 예상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내놓은 2018년 "생식독성물질 취급 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관리 중인 생식독성 물질의 수는 유통되는 화학물질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특별관리물질에 포함되지 않는 생식독성물질은 직업환경측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파악조치 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일하면서 생식독성물질인지도 모르고 접한 뒤 아이 질환까지 이어진 노동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 산재 신청을 하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역학조사를 벌이는데 조사에서 산업안전보건법에 빠져 있는 물질들을 고려하지 않게 될 겁니다.

■본인 탓만 할 수밖에 없는 부모 노동자들...."산재 신청이라도 가능하길"

현재는 아이 질환과 관련해서는 산재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산재보험법상 산재 급여는 근로자 본인만 해당하기 때문에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 적용 대상이 확대되야 가능하다는게 근로복지공단의 입장입니다.

제주의료원 판결 이후 개정 작업에 착수했고, 21대 국회 들어 관련 법안만 3개나 발의된 상태입니다.

고용노동부는 태아 산재를 인정하고 있는 독일 제도 용역 연구를 이미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산재보험법 개정안 적용 대상과 보상 범위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국회 입법 과정에서 정부 의견을 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희정 씨는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을 자꾸 탓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은 여성 노동자들이 임신하면 일을 그만두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때 일을 그만뒀더라면 아이가 괜찮지 않았을까 후회합니다.

김 씨는 "왜 나를 아프게 낳았어"라고 묻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A 씨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예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건강도 잃고 아이의 건강도 좋지 못한 상황.

강하게 업무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기에 산재를 신청해서 조사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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