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커브볼’ 던졌다”…30년만에 밝혀진 1차 북핵 위기 수습 전말은?

입력 2024.03.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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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 모습1994년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 모습

1993년은 지금까지도 한반도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북핵' 위기가 시작된 해입니다. 이 시기 북미 간 치열한 외교전과 수싸움을 엿볼 수 있는 외교문서가 30년이 지나 공개됐습니다.

■ "커브볼처럼 예상 못 한 경수로 제안"…'제네바 합의' 초석

1993년 3월 12일, 북한 당국은 '핵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촉발했습니.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내 미신고 핵시설 2곳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고, 그해 1월에는 한미 양군이 한동안 중단했던 연합훈련,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이 크게 반발한 겁니다.

결국 석 달이 지나 6월 초, 미국 뉴욕에서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북한은 NPT 탈퇴 유보, 미국은 무력 불행사 조건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급한 불은 꺼졌습니다. 이후 한 달 뒤 열린 2차 회담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기존 흑연 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데 미국이 협조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1993년 북미간 2차 고위급 접촉 이후 미국 측 평가를 담은 외교문서 일부.1993년 북미간 2차 고위급 접촉 이후 미국 측 평가를 담은 외교문서 일부.

이러한 제안은 당시 미국에게도 '야구 경기에서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마냥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만, 제안 자체는 핵 비확산을 향한 중요한 진척으로 평가했습니다. 이후 북미 양국은 이듬해 10월,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고, 북한 핵 동결과 NPT 잔류를 대가로 경수로 지원에 합의합니다.

■ 김일성 "북한, 핵무기도 없고 만들 능력·이유·돈 없어"…김영삼 "거짓말"

하지만 당시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이후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특히 IAEA의 핵시설 사찰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3년 10월 개리 애커먼 미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은 또 다른 분기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하던 케네스 퀴노네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에게, 김계관 북한 외교부 순회대사는 손수 쓴 메모를 통해 ▲NPT 영구 잔류 ▲특별사찰을 포함한 IAEA와의 완전 협력 등을 내세우며 ▲북미 관계 정상화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과 맞바꾸자는 '일괄 타결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애커먼 소위원장은 한국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시 '면담요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애커먼에게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제조 능력도 없고,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나 동기, 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며, "위성 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두환 "뉴욕에서 무기 가진 사람들이 난동부리면 민주인사냐"

이 밖에도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와 관련된 외교문서들도 일부 공개됐습니다.

당시 전 씨는 1988년 3월 22일부터 3주가량의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D.C.와 뉴욕, 하와이 등을 방문했는데,
이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이 있고 나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입니다.

일정 후반부였던 4월 7일, 전 씨는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주제로 연설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했는데, 한 참가자로부터 "언론을 탄압하고 경찰국가를 운영한 이유"와 "광주사태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1988년 3월 전두환 씨의 미국 방문 당시 미국외교협회 연설 관련 외교문서 일부.1988년 3월 전두환 씨의 미국 방문 당시 미국외교협회 연설 관련 외교문서 일부.

이에 전 씨는 "경찰국가라고 했지만 만일 뉴욕에서 무기와 수류탄을 가진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난동을 벌일 때 그런 사람을 민주인사로 볼 것인가, 또는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로 볼 것인가"라며 반문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일종의 '난동'으로 왜곡했습니다.

또 "평화적 시위자들을 구금하고 포악하게 다루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며 법을 어긴 이들이 법에 따라 처리됐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어 "5년 뒤에도 군 장성이 대통령이 될 것인지, 어떤 인물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5년 뒤 대통령이 군 출신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고,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군 출신도 영관 출신도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나라도 군인 출신이 너무 많아 군 출신을 제외하면 대통령 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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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30 06: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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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 모습
1993년은 지금까지도 한반도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북핵' 위기가 시작된 해입니다. 이 시기 북미 간 치열한 외교전과 수싸움을 엿볼 수 있는 외교문서가 30년이 지나 공개됐습니다.

■ "커브볼처럼 예상 못 한 경수로 제안"…'제네바 합의' 초석

1993년 3월 12일, 북한 당국은 '핵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촉발했습니.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내 미신고 핵시설 2곳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고, 그해 1월에는 한미 양군이 한동안 중단했던 연합훈련,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이 크게 반발한 겁니다.

결국 석 달이 지나 6월 초, 미국 뉴욕에서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북한은 NPT 탈퇴 유보, 미국은 무력 불행사 조건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급한 불은 꺼졌습니다. 이후 한 달 뒤 열린 2차 회담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기존 흑연 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데 미국이 협조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1993년 북미간 2차 고위급 접촉 이후 미국 측 평가를 담은 외교문서 일부.
이러한 제안은 당시 미국에게도 '야구 경기에서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마냥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만, 제안 자체는 핵 비확산을 향한 중요한 진척으로 평가했습니다. 이후 북미 양국은 이듬해 10월,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고, 북한 핵 동결과 NPT 잔류를 대가로 경수로 지원에 합의합니다.

■ 김일성 "북한, 핵무기도 없고 만들 능력·이유·돈 없어"…김영삼 "거짓말"

하지만 당시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이후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특히 IAEA의 핵시설 사찰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3년 10월 개리 애커먼 미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은 또 다른 분기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하던 케네스 퀴노네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에게, 김계관 북한 외교부 순회대사는 손수 쓴 메모를 통해 ▲NPT 영구 잔류 ▲특별사찰을 포함한 IAEA와의 완전 협력 등을 내세우며 ▲북미 관계 정상화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과 맞바꾸자는 '일괄 타결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애커먼 소위원장은 한국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시 '면담요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애커먼에게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제조 능력도 없고,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나 동기, 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며, "위성 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두환 "뉴욕에서 무기 가진 사람들이 난동부리면 민주인사냐"

이 밖에도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와 관련된 외교문서들도 일부 공개됐습니다.

당시 전 씨는 1988년 3월 22일부터 3주가량의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D.C.와 뉴욕, 하와이 등을 방문했는데,
이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이 있고 나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입니다.

일정 후반부였던 4월 7일, 전 씨는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주제로 연설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했는데, 한 참가자로부터 "언론을 탄압하고 경찰국가를 운영한 이유"와 "광주사태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1988년 3월 전두환 씨의 미국 방문 당시 미국외교협회 연설 관련 외교문서 일부.
이에 전 씨는 "경찰국가라고 했지만 만일 뉴욕에서 무기와 수류탄을 가진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난동을 벌일 때 그런 사람을 민주인사로 볼 것인가, 또는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로 볼 것인가"라며 반문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일종의 '난동'으로 왜곡했습니다.

또 "평화적 시위자들을 구금하고 포악하게 다루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며 법을 어긴 이들이 법에 따라 처리됐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어 "5년 뒤에도 군 장성이 대통령이 될 것인지, 어떤 인물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5년 뒤 대통령이 군 출신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고,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군 출신도 영관 출신도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나라도 군인 출신이 너무 많아 군 출신을 제외하면 대통령 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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