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에도 존중받지 못했다…위패 관리도 엉망 [창+]

입력 2024.07.01 (07:00) 수정 2024.07.01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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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창 '포천 372고지 539명' 중에서]

2000년 4월 한국 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인 박선주 교수는 당시 발굴 전문가로 참여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육군에서 유해 발굴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 그래서 보니까 처음에는 그게 무슨 체질 인류학자 하나 장의사 둘 이렇게 돼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어떻게 이런 사업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래서 문화재 발군 수준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육본을 설득해서 발굴단을 구성하게 됐어요

생도들의 전투 현장이었던 내촌 지역에서는 2년 뒤인 2002년 5월 발굴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2002년도 발굴 사업에 원래 다른 지역이 돼 있었는데 이 광릉내 포천 지역 내에서는 짧은 발굴 기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소위 발굴 정식 거기 들어있지 않고 있다가 제보가 들어오니까 그 사이에 짧은 기간에 그 광릉내 발굴을 한다 이렇게 육본이 결정을 해서 가게 됐죠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 최인건 팀장은 당시 병사로 내촌리 발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인터뷰> 최인건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발굴 팀장
47번 국도가 북에서 남쪽으로 이렇게 내려오는 그런 방향에서 47번 국도가 바라다 보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여기 길에서 위로 얼마나 올라갔나요? 그렇게 멀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한 100m 정도?

취재진이 다시 현장을 찾았습니다.

6월 25일 생도들이 출동해 처음 진지를 만든 곳에서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가파른 비탈 아래 육사 생도 전사 지점을 알리는 비석이 누워 있습니다.

발굴팀은 이 지역에서 모두 6구의 유해를 찾아냈는데 한 구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견됐습니다.

발굴 당시 사진입니다. 머리 부분에는 철모가 보이고 허리 부분에는 대검과 탄띠 그리고 실탄 뭉치가 보입니다.

<인터뷰> 최인건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발굴 팀장
얼굴 부위에 철모를 덮고 계셨습니다. 쓰고 계신 게 아니라 덮고 계셨고 곧은 자세로 누워 계셨어요. 대부분 유해 발굴을 하다보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자세거든요. 그러니까 사망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꼭 누군가 다시 거기에 정성스럽게 매장을 해주신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이 유해에서 생도로 추정되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그래서 발굴을 다 완료해 놓고 철모를 보니까 처음에는 철모에 겉은 아무 글자가 없었어요. 글자가 없었는데 철모 안에 이렇게 뒤집어서 보고 그 안에 스파츌라라고 하는 얇은 도구가 있었는데 그걸로 넣어서 틈을 벌리니까
그 철모 내피가 떨어져 나오더라고요. 나오는데 보니까 거기 육사라고 적혀 있어서 이분이 육사였었구나.”

육사 생도로 추정할 수 있는 유해는 이 한 구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해는 육사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 교수
정식으로 모셔야 되니까 육사니까 육사에 연락을 하고 육사에서는 이분을 어떻게 모실까 아마 자기네들끼리 논의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나중에 후일담으로 들었지만 여러 가지 논쟁이 있었고 1기생 2기생 문제가 있고 1기생인지 2기생인지 그때는 우리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모시느냐 자기네들끼리 논쟁을 하다 저희는 그분을 육사에서 장례식을 치러드리길 원했죠.

그날 이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생도들의 유해는 더 이상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아래는 위패 봉안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봉안된 김세곤 그리고 김명곤은 형제입니다.

1928년생 동생 김명곤은 생도 1기로 1950년 6월 28일 태릉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대학로 임시 국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북한군에게 살해됐습니다.

서울대생이었던 형 김세곤은 1952년 봄 자원 입대해 소위로 전장에 나섰다가 그해 10월 31일 강원도 철원에서 전사합니다.

유해를 발견하지 못한 전사자는 김명곤 생도처럼 국립 현충원에 위패로 봉안합니다.

하지만 [시사기획 창]의 취재 결과 계상현, 김종기, 김황호 이영복 등 1기 생도 7명의 위패는 없었습니다.

1950년 7월 1일 금곡리 전투에서 산화한 신현주 생도와 양한근 생도는 위패가 두 개씩 있습니다.

하나는 생도 하나는 중위입니다.

불암산 유격대 강원기 생도는 부상 후 귀향했다가 후유증으로 작고했으나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습니다.

김명곤 생도와 전희택 생도는 계급이 중령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노경조 생도는 위패도 묘지도 있습니다.

전사 일자, 장소도 다른 게 많습니다.

이처럼 생도 1기 2기와 관련해 취재진이 발견한 오류만 수십 건입니다.

국방부에 확인결과 6·25 전쟁 등에 참여한 국가유공자가 사망하면 각 군에서 송부한 “매·화장 보고서”를 토대로 안장하고 있는데 안장자의 출신별 정보는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육사 생도 1, 2기 전사자 확인은 제한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사자들에 대한 기록을 책임지는 부처도 없고 잘못된 것을 시정할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방송 : 2024년 6월 25일 (화) 10시 KBS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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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7-01 07: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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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한국 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인 박선주 교수는 당시 발굴 전문가로 참여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육군에서 유해 발굴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 그래서 보니까 처음에는 그게 무슨 체질 인류학자 하나 장의사 둘 이렇게 돼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어떻게 이런 사업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래서 문화재 발군 수준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육본을 설득해서 발굴단을 구성하게 됐어요

생도들의 전투 현장이었던 내촌 지역에서는 2년 뒤인 2002년 5월 발굴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2002년도 발굴 사업에 원래 다른 지역이 돼 있었는데 이 광릉내 포천 지역 내에서는 짧은 발굴 기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소위 발굴 정식 거기 들어있지 않고 있다가 제보가 들어오니까 그 사이에 짧은 기간에 그 광릉내 발굴을 한다 이렇게 육본이 결정을 해서 가게 됐죠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 최인건 팀장은 당시 병사로 내촌리 발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인터뷰> 최인건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발굴 팀장
47번 국도가 북에서 남쪽으로 이렇게 내려오는 그런 방향에서 47번 국도가 바라다 보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여기 길에서 위로 얼마나 올라갔나요? 그렇게 멀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한 100m 정도?

취재진이 다시 현장을 찾았습니다.

6월 25일 생도들이 출동해 처음 진지를 만든 곳에서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가파른 비탈 아래 육사 생도 전사 지점을 알리는 비석이 누워 있습니다.

발굴팀은 이 지역에서 모두 6구의 유해를 찾아냈는데 한 구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견됐습니다.

발굴 당시 사진입니다. 머리 부분에는 철모가 보이고 허리 부분에는 대검과 탄띠 그리고 실탄 뭉치가 보입니다.

<인터뷰> 최인건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발굴 팀장
얼굴 부위에 철모를 덮고 계셨습니다. 쓰고 계신 게 아니라 덮고 계셨고 곧은 자세로 누워 계셨어요. 대부분 유해 발굴을 하다보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자세거든요. 그러니까 사망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꼭 누군가 다시 거기에 정성스럽게 매장을 해주신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이 유해에서 생도로 추정되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그래서 발굴을 다 완료해 놓고 철모를 보니까 처음에는 철모에 겉은 아무 글자가 없었어요. 글자가 없었는데 철모 안에 이렇게 뒤집어서 보고 그 안에 스파츌라라고 하는 얇은 도구가 있었는데 그걸로 넣어서 틈을 벌리니까
그 철모 내피가 떨어져 나오더라고요. 나오는데 보니까 거기 육사라고 적혀 있어서 이분이 육사였었구나.”

육사 생도로 추정할 수 있는 유해는 이 한 구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해는 육사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 교수
정식으로 모셔야 되니까 육사니까 육사에 연락을 하고 육사에서는 이분을 어떻게 모실까 아마 자기네들끼리 논의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나중에 후일담으로 들었지만 여러 가지 논쟁이 있었고 1기생 2기생 문제가 있고 1기생인지 2기생인지 그때는 우리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모시느냐 자기네들끼리 논쟁을 하다 저희는 그분을 육사에서 장례식을 치러드리길 원했죠.

그날 이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생도들의 유해는 더 이상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아래는 위패 봉안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봉안된 김세곤 그리고 김명곤은 형제입니다.

1928년생 동생 김명곤은 생도 1기로 1950년 6월 28일 태릉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대학로 임시 국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북한군에게 살해됐습니다.

서울대생이었던 형 김세곤은 1952년 봄 자원 입대해 소위로 전장에 나섰다가 그해 10월 31일 강원도 철원에서 전사합니다.

유해를 발견하지 못한 전사자는 김명곤 생도처럼 국립 현충원에 위패로 봉안합니다.

하지만 [시사기획 창]의 취재 결과 계상현, 김종기, 김황호 이영복 등 1기 생도 7명의 위패는 없었습니다.

1950년 7월 1일 금곡리 전투에서 산화한 신현주 생도와 양한근 생도는 위패가 두 개씩 있습니다.

하나는 생도 하나는 중위입니다.

불암산 유격대 강원기 생도는 부상 후 귀향했다가 후유증으로 작고했으나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습니다.

김명곤 생도와 전희택 생도는 계급이 중령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노경조 생도는 위패도 묘지도 있습니다.

전사 일자, 장소도 다른 게 많습니다.

이처럼 생도 1기 2기와 관련해 취재진이 발견한 오류만 수십 건입니다.

국방부에 확인결과 6·25 전쟁 등에 참여한 국가유공자가 사망하면 각 군에서 송부한 “매·화장 보고서”를 토대로 안장하고 있는데 안장자의 출신별 정보는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육사 생도 1, 2기 전사자 확인은 제한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사자들에 대한 기록을 책임지는 부처도 없고 잘못된 것을 시정할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방송 : 2024년 6월 25일 (화) 10시 KBS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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