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게이트’ 박동선 씨 별세…1970년대 한미관계 뒤흔든 그는 누구?

입력 2024.09.20 (01:52) 수정 2024.09.20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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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한미관계를 뒤흔든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동선 씨가 19일 별세했습니다.

박 씨는 지병을 앓던 중 상태가 나빠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향년 89세.

코리아게이트는 1976년 10월 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90여 명의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에게 전달하는 매수공작을 벌였다'고 1면에 대서특필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박 씨를 '국제 로비스트' '동양의 위대한 개츠비'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교클럽서 미 정·재계 인맥 형성…게이트 파문으로

평안남도 순천 태생인 박 씨는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워싱턴DC에 사교모임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어 현지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인물입니다.

박 씨가 1947년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고, 외교관을 꿈꾸던 박 씨는 당시 장면 국무총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이 이어졌던 1960년대 말에는 미국 5개 주에서 생산된 쌀을 수입해달라는 미 하원의원들의 제안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면서 쌀 중개권을 얻기도 했습니다.

미 정계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박동선의 존재는 1969년 '주한미군 감축'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이 선언되며 한국 정부에게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박 씨는 지난 2013년 '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에 출연해 "(당시) 미국의 정치가 사무실이 아닌 워싱턴 사교클럽에서 이뤄지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씨는 코리아게이트가 대서특필된 1976년 10월 24일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놀라운 건 아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과 각료들 중에서도 제일 가깝던 존미첼 법무장관이 (…)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FBI에게 나를 조사하라고 그랬으니까 알고 있으라고 (했고).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저한테 여러번 한국 정부를 위해서 로비하고 있는지 취재했었고요. 그렇게 큰 사건으로 펼쳐질지는 몰랐습니다."
-박동선 씨 / '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2013.1)

같은 해 11월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중앙정보부 소속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정권이 미 정치인 등을 포섭해 미국 내 긍정적 여론을 유도하려 했다는 이른바 '백설작전'(Operation Snow White)을 폭로했습니다.

이어 1977년 6월 말 미 유력지 뉴욕타임스(NYT)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박 씨에게 미국 내 로비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으로 포착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내 반한 여론이 들끓는 등 한미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미 특검 조사에 '자금 제공 인정'…"한국정부는 관계 없다"

당시 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 카터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선언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의혹을 집중 제기해온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코리아게이트 조사에 나섰고, 특별검사팀까지 구성돼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박 씨는 결국 미 체류 기간 신분보장 등을 약속받고 1978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 등에 출석해 증언했습니다.

박 씨는 미 의원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인정했고, 사건은 박 씨로부터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의 징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당시 박 씨는 자신의 행동이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과 미국에 대한 친선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며 한국 정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청문회에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도 나와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이후 박 씨는 1990년대에 UN 50주년기념재단 고문과 UN 사무총장 개인고문 등을 역임했습니다.

박 씨는 2006년 유엔의 대(對)이라크 석유-식량계획과 관련해 이라크로부터 250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박 씨는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9월 조기 석방돼 귀국했고, 이후 한국에 주로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박 씨의 빈소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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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아게이트’ 박동선 씨 별세…1970년대 한미관계 뒤흔든 그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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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9-20 07: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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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한미관계를 뒤흔든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동선 씨가 19일 별세했습니다.

박 씨는 지병을 앓던 중 상태가 나빠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향년 89세.

코리아게이트는 1976년 10월 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90여 명의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에게 전달하는 매수공작을 벌였다'고 1면에 대서특필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박 씨를 '국제 로비스트' '동양의 위대한 개츠비'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교클럽서 미 정·재계 인맥 형성…게이트 파문으로

평안남도 순천 태생인 박 씨는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워싱턴DC에 사교모임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어 현지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인물입니다.

박 씨가 1947년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고, 외교관을 꿈꾸던 박 씨는 당시 장면 국무총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이 이어졌던 1960년대 말에는 미국 5개 주에서 생산된 쌀을 수입해달라는 미 하원의원들의 제안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면서 쌀 중개권을 얻기도 했습니다.

미 정계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박동선의 존재는 1969년 '주한미군 감축'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이 선언되며 한국 정부에게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박 씨는 지난 2013년 '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에 출연해 "(당시) 미국의 정치가 사무실이 아닌 워싱턴 사교클럽에서 이뤄지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씨는 코리아게이트가 대서특필된 1976년 10월 24일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놀라운 건 아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과 각료들 중에서도 제일 가깝던 존미첼 법무장관이 (…)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FBI에게 나를 조사하라고 그랬으니까 알고 있으라고 (했고).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저한테 여러번 한국 정부를 위해서 로비하고 있는지 취재했었고요. 그렇게 큰 사건으로 펼쳐질지는 몰랐습니다."
-박동선 씨 / '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2013.1)

같은 해 11월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중앙정보부 소속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정권이 미 정치인 등을 포섭해 미국 내 긍정적 여론을 유도하려 했다는 이른바 '백설작전'(Operation Snow White)을 폭로했습니다.

이어 1977년 6월 말 미 유력지 뉴욕타임스(NYT)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박 씨에게 미국 내 로비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으로 포착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내 반한 여론이 들끓는 등 한미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미 특검 조사에 '자금 제공 인정'…"한국정부는 관계 없다"

당시 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 카터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선언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의혹을 집중 제기해온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코리아게이트 조사에 나섰고, 특별검사팀까지 구성돼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박 씨는 결국 미 체류 기간 신분보장 등을 약속받고 1978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 등에 출석해 증언했습니다.

박 씨는 미 의원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인정했고, 사건은 박 씨로부터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의 징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당시 박 씨는 자신의 행동이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과 미국에 대한 친선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며 한국 정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청문회에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도 나와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이후 박 씨는 1990년대에 UN 50주년기념재단 고문과 UN 사무총장 개인고문 등을 역임했습니다.

박 씨는 2006년 유엔의 대(對)이라크 석유-식량계획과 관련해 이라크로부터 250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박 씨는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9월 조기 석방돼 귀국했고, 이후 한국에 주로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박 씨의 빈소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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