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을 지나다보니, 출근길 시민들 사이로 주인 모를 가방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한 단체가 나눠주는 점심 도시락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일찌감치 가방으로 줄을 선 겁니다.
11시가 넘어 나타나기 시작한 가방 주인들. 거의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근처 다른 무료 급식소 두 곳까지 포함하면, 하루 1천 명에 가까운 노인들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민간 무료 급식으로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무료 급식을 이용하는 이유, 돈 때문일 것 같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전부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동작구에서 첫차를 타고 와 줄을 섰다는 70세 노인은 "보통 5백 명 정도 줄을 서는데 나는 오늘로 아홉 번째 왔다"라며 "집에서 밥을 먹어도 되지만 도시락이 먹을 만하고, 외로워서 시간도 보낼 겸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료 급식소 앞에서 만난 한 70대 노인은 "집에서 먹으면 보통 한 가지 반찬하고 밥을 먹지 않냐. 찌개 하나 놓고, 김치 놓고 먹거나. 근데 여기 오면 서너 가지 반찬을 주니까 먹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급식소 단골이라는 한 90대 노인도 "혼자 사니까 집에서 먹기 힘들어서 운동 삼아 여기까지 와서 점심 한 끼를 먹고 가곤 한다"면서 "아침 저녁은 집에서 먹는데, 애들이 해온 음식을 먹거나 반찬을 사다 먹는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며 웃어보였습니다.
혼자 집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외롭고, 제대로 챙겨 먹을 수도 없으니 급식소를 찾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탑골공원 근처에서 32년간 무료 급식소를 운영해온 사회복지원각의 대표 원경 스님은 "식판에 밥을 산처럼 쌓아서 드시는 분, 한 끼로 24시간을 견디시는 분도 계시지만, 수급자도 아니고 자녀가 있는 어르신들도 많이 오신다"며 "조미료를 쓰지 않고 적어도 3찬 이상은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이 무료 급식소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고 했습니다.
■ 노인의 한 끼, '소득' 기준이 최선?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의 노인 식사 지원 정책은 줄곧 '저소득층'에 집중돼 왔습니다.
대부분 자치단체에서 복지관 등의 '경로식당'과 '식사 배달' 사업으로 기초생활수급, 차상위 계층 노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합니다.
KBS가 226개 기초자치단체 결산서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지난해 노인 무료 식사 지원에 들어간 예산은 경기도 455억 원, 서울시 403억 원 등 총 1천787억 원가량이었습니다. 서울시 강동구가 지난해 전체 노인 복지 분야에 쓴 예산(1천788억 원)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이 예산으로 지난해 저소득층 노인 15만 7천여 명이 무료로 식사를 제공 받았습니다.
문제는 결식이나 부실한 식사가 저소득 노인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이 중위소득 대비 150% 이상인 노인의 30.7%가 영양관리에 주의 또는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소득층(중위소득 대비 50% 미만) 노인의 경우 이 비율이 40%로 다소 높았지만, 큰 차이가 나진 않는 수준입니다.
구슬이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장은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노년기에는 음식을 부실하게 먹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빵, 떡, 누룽지 등 탄수화물 위주의 간편식으로 때우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영양 결핍이나 만성질환 악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정 소득 수준을 넘은 노인층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식사 서비스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집에서 밥을 먹을 형편이 되는 노인들이 탑골공원 앞 '맛집'으로 유명해진 무료 급식소까지 오게 되는 배경입니다.
20%를 넘어선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비율도 식사 지원 확대의 필요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 결과, 노인 1인가구의 45.6%가 영양관리에 주의나 개선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김정현 한경국립대 교수는 "노인기에 접어들면 장을 보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는데, 특히 혼자 사는 가구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먹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미국은 노인에게 식사 지원을 함에 있어 소득 기준이 아닌, 조리 능력과 식품 접근성 등을 따진다"며 "그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도 65세 이상의 최소 30~40%는 식사 지원 수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 "노인 식사 지원 다양화, '비용' 아닌 '투자'"
우리나라에서도 소득 기준을 벗어난 노인 '먹거리 돌봄' 실험이 하나둘씩 진행 중입니다. 서울 마포구는 지난해부터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75세 이상 주민에게 무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효도밥상'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부산진구에서는 자치단체와 지역 대학이 함께 운영하는 커뮤니티 키친에서, 저소득층이 아니지만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기 어려운 노인들에게도 한 끼에 5~9천 원을 받고 맞춤형 식사를 제공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구슬이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장은 "민간의 노인 대상 식사 서비스는 고소득층만 이용 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에 결국 공공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지속 가능하고 대상자를 확대할 수 있는 사업으로 만들려면, 감당 가능한 노인은 실비 수준의 이용료를 내고 식사를 하는 방식도 열어주면서 선택지를 다양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노인 식사 지원을 더 큰 사회적 돌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기적 '투자'로 봐야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김정현 한경국립대 교수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식사 등 일상생활 기능이 조금만 무너져도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는데, 1인당 들어가는 건강보험 재정이 어마어마하다"며 "식생활 지원을 통해 노인들이 시설로 가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한다면 투자 대비 효과가 굉장히 클 것으로 생각한다. 식사 지원을 더이상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건강한 노후를 위한 통합 돌봄의 한 축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월 24일 방영된 KBS <더 보다> '어르신, 식사하셨어요?' 편 다시보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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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을 돈 있어도 ‘무료 급식’ 줄 서는 노인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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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12-01 07:00:06
월요일 아침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을 지나다보니, 출근길 시민들 사이로 주인 모를 가방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한 단체가 나눠주는 점심 도시락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일찌감치 가방으로 줄을 선 겁니다.
11시가 넘어 나타나기 시작한 가방 주인들. 거의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근처 다른 무료 급식소 두 곳까지 포함하면, 하루 1천 명에 가까운 노인들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민간 무료 급식으로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무료 급식을 이용하는 이유, 돈 때문일 것 같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전부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동작구에서 첫차를 타고 와 줄을 섰다는 70세 노인은 "보통 5백 명 정도 줄을 서는데 나는 오늘로 아홉 번째 왔다"라며 "집에서 밥을 먹어도 되지만 도시락이 먹을 만하고, 외로워서 시간도 보낼 겸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료 급식소 앞에서 만난 한 70대 노인은 "집에서 먹으면 보통 한 가지 반찬하고 밥을 먹지 않냐. 찌개 하나 놓고, 김치 놓고 먹거나. 근데 여기 오면 서너 가지 반찬을 주니까 먹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급식소 단골이라는 한 90대 노인도 "혼자 사니까 집에서 먹기 힘들어서 운동 삼아 여기까지 와서 점심 한 끼를 먹고 가곤 한다"면서 "아침 저녁은 집에서 먹는데, 애들이 해온 음식을 먹거나 반찬을 사다 먹는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며 웃어보였습니다.
혼자 집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외롭고, 제대로 챙겨 먹을 수도 없으니 급식소를 찾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탑골공원 근처에서 32년간 무료 급식소를 운영해온 사회복지원각의 대표 원경 스님은 "식판에 밥을 산처럼 쌓아서 드시는 분, 한 끼로 24시간을 견디시는 분도 계시지만, 수급자도 아니고 자녀가 있는 어르신들도 많이 오신다"며 "조미료를 쓰지 않고 적어도 3찬 이상은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이 무료 급식소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고 했습니다.
■ 노인의 한 끼, '소득' 기준이 최선?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의 노인 식사 지원 정책은 줄곧 '저소득층'에 집중돼 왔습니다.
대부분 자치단체에서 복지관 등의 '경로식당'과 '식사 배달' 사업으로 기초생활수급, 차상위 계층 노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합니다.
KBS가 226개 기초자치단체 결산서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지난해 노인 무료 식사 지원에 들어간 예산은 경기도 455억 원, 서울시 403억 원 등 총 1천787억 원가량이었습니다. 서울시 강동구가 지난해 전체 노인 복지 분야에 쓴 예산(1천788억 원)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이 예산으로 지난해 저소득층 노인 15만 7천여 명이 무료로 식사를 제공 받았습니다.
문제는 결식이나 부실한 식사가 저소득 노인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이 중위소득 대비 150% 이상인 노인의 30.7%가 영양관리에 주의 또는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소득층(중위소득 대비 50% 미만) 노인의 경우 이 비율이 40%로 다소 높았지만, 큰 차이가 나진 않는 수준입니다.
구슬이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장은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노년기에는 음식을 부실하게 먹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빵, 떡, 누룽지 등 탄수화물 위주의 간편식으로 때우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영양 결핍이나 만성질환 악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정 소득 수준을 넘은 노인층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식사 서비스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집에서 밥을 먹을 형편이 되는 노인들이 탑골공원 앞 '맛집'으로 유명해진 무료 급식소까지 오게 되는 배경입니다.
20%를 넘어선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비율도 식사 지원 확대의 필요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 결과, 노인 1인가구의 45.6%가 영양관리에 주의나 개선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김정현 한경국립대 교수는 "노인기에 접어들면 장을 보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는데, 특히 혼자 사는 가구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먹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미국은 노인에게 식사 지원을 함에 있어 소득 기준이 아닌, 조리 능력과 식품 접근성 등을 따진다"며 "그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도 65세 이상의 최소 30~40%는 식사 지원 수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 "노인 식사 지원 다양화, '비용' 아닌 '투자'"
우리나라에서도 소득 기준을 벗어난 노인 '먹거리 돌봄' 실험이 하나둘씩 진행 중입니다. 서울 마포구는 지난해부터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75세 이상 주민에게 무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효도밥상'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부산진구에서는 자치단체와 지역 대학이 함께 운영하는 커뮤니티 키친에서, 저소득층이 아니지만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기 어려운 노인들에게도 한 끼에 5~9천 원을 받고 맞춤형 식사를 제공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구슬이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장은 "민간의 노인 대상 식사 서비스는 고소득층만 이용 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에 결국 공공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지속 가능하고 대상자를 확대할 수 있는 사업으로 만들려면, 감당 가능한 노인은 실비 수준의 이용료를 내고 식사를 하는 방식도 열어주면서 선택지를 다양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노인 식사 지원을 더 큰 사회적 돌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기적 '투자'로 봐야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김정현 한경국립대 교수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식사 등 일상생활 기능이 조금만 무너져도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는데, 1인당 들어가는 건강보험 재정이 어마어마하다"며 "식생활 지원을 통해 노인들이 시설로 가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한다면 투자 대비 효과가 굉장히 클 것으로 생각한다. 식사 지원을 더이상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건강한 노후를 위한 통합 돌봄의 한 축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월 24일 방영된 KBS <더 보다> '어르신, 식사하셨어요?' 편 다시보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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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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