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하순, 영남 지역을 덮친 초대형 산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구덩이 속 목숨을 건 피난, 그리고 멈출 수 없었던 화마와의 사투.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이른바 ‘괴물 산불’은 이제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북 의성군에서 처음 산불이 시작된 건 지난달 22일, 순간 최대풍속 초속 27m에 이르는 태풍급 강풍은 불씨를 사방으로 흩날렸습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도깨비 불’에 산불은 순식간에 인근의 안동과 영양, 청송으로 번졌고, 사흘 만에 경북 영덕군의 해안가 마을까지 불태웠습니다.
피해 지역 곳곳에서 필사의 탈출이 이뤄졌고,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산불 진압 작전이 진행됐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건조한 서풍과 함께 바싹 마른 낙엽들이 ‘연료’ 역할을 하며, 갈수록 불길이 거세졌습니다.
이병두/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난연구부장 이번 산불 같은 경우는 고온 건조 바람 그리고 숲이 한꺼번에 조합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평년보다 10도나 높은 고온이 있었고요. 여기 이 상태에서 강한 바람이 들어왔었고요. 또 해당 지역에는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어우러져서 가장 빠른 그리고 가장 파괴적인 산불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
산불이 난 지 열흘이 지나서야 진압된 영남권 대형 산불,
축구장 4,600개 면적을 잿더미로 만들며 이제껏 보지 못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주민과 산불 전문 예방진화대원, 헬기 조종사까지 31명이 숨지는 등 8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주택과 창고, 사찰 등 6천 채가 넘는 건물이 화마에 삼켜졌습니다.
재산 피해는 2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악의 산불에 사람들 마음에도 검은 재가 내려앉았습니다.
산불 진압 이틀 뒤, 화마가 휩쓸고 간 마을을 찾았습니다.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이 마을은 이번 산불로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탔습니다.

마을 곳곳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탈 때까지 다 타버린 지붕은 폭삭 주저앉았고, 100년 넘게 주민들과 함께해온 교회도 검게 탄 흉물이 됐습니다.
제대로 된 옷 한 벌, 수저 하나 챙겨 나올 수 없었던 그날.

마부진/경북 의성군 단촌면 피란 갔다 올 때보다 더 해요. 6.25 사변 때보다. 6.25 사변 때는 끓여 먹을 때 밥이라도 가지고 나왔죠. 이번엔 숟가락도 숟가락 한 개 못 가지고 나왔어. 그때는 우리 피란 갔을 때 냄비하고 숟가락하고는 가지고 나와서 끓여 먹고 집에 들어와서 끓여 먹었지만 지금 숟가락 한 개 다 타버리고 없어요. |
평생의 추억이 담긴 집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할아버지는 눈물조차 말라버렸습니다.
피해가 큰 만큼 복구 작업도 섣불리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 이재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말임/경북 의성군 단촌면 내가 여기 시집와서 22살에 와서 55년이나 됐는데, 지금 일흔여덟이니까 그래 됐는데. 그걸 거기 다 묻어버리니까 (평생 계셨던 집인데)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서 못 해요. 권영순/경북 영양군 석보면 저녁 먹다가 밥숟가락 하나 들었다가 이장이 이 회관으로 피하라고 하는데 불이 막 양쪽으로 다 와서 이 앞에 다 타는데. 눈을 뜰 수 있어야 뭘 꺼내든지 하지. 내 살아야 한다 싶어서. 팔십 평생 살다가 이런 일도 있습니까. 너무 참혹한 일이 있어서. |
농번기를 앞두고 닥친 산불은 묘목도 농기계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나마 성한 농기구로 애써 내일을 준비하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주쌍옥/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사도 하긴 해야 하는데. 전기도 없고. 기계도 농기구 이런 것도. 건조기 이런 거 다 타버렸잖아요. 건조기 없는데 고추 농사를 어떻게 하나요. 사과나무도 심으려고 했는데 이거 다 못쓰게 됐고. 이렇게 고루고루 탄 곳이 없어요. 집이 안 타면 밭이 타고, 밭이 안타면 산이 타고. 가면서 전부 다 불길이 안 지나간 자리가 없어요. 사람이 불 내려고 해도 이렇게 못 내거든요. |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모인 곳은 임시 대피소.
취재진은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차가운 바닥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이재민 대부분은 노인들이었습니다.

이번 산불 피해는 특히 농촌의 노인 등 취약계층에 집중됐습니다.
산불 사망자 31명 중 60대 이상 고령층은 29명으로, 고령화된 인구 소멸 지역이 재난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산불이 보여준 겁니다.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대부분 대피하는 과정 혹은 대피하지 못해서 손상 이런 상황에서 이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건 우리가 굉장히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똑같은 대피 명령을 받고 똑같이 대피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기민하게 대피하시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거고요 |
실제 고령층 사망자 대부분은 제대로 대피하지 못한 채, 집 근처나 차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산불 발생 당시 주민들의 대피를 위해 천 건이 넘는 재난 문자가 발송됐지만, 대피 장소는 수시로 바뀌었고, 이마저도 통신이 끊기거나 구형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고령층에겐 잘 닿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대형화된 산불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재난 경보 시스템의 구멍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이번 초대형 산불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고령층이 대부분인 농촌에선 마을 이장의 안내 방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이장이 상황을 늦게 인식하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현실,
정부와 지자체의 경보와 대피 시스템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사실 훨씬 더 선제적인 대피를 하시는 게 중요하거든요. 확산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라면 사실 이분들은 대피 명령 이전에라도 우선 먼저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시킬 수 있게끔 하는 체계가 어떻게 보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이런 것들에 따라주실 수 있는 '이런 사회적인 합의 이런 것들도 필요한 상황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
열흘 동안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곳곳을 불태웠던 산불,
다시 찾아간 피해 현장에선 현재 산불 대응 시스템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불에 타기 쉬운 소나무 같은 침엽수들이 빽빽했던 산, 불이 붙기 시작하자 거대한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숲이 매우 과밀하다는 겁니다. 연료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 불에 탔는데도 이 정도인데. ‘불타기 전에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잡목이 우거져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료 물질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불이 붙으면 굉장히 큰 불길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고요. |
불은 순식간에 타올라 빠르게 확산했지만, 진압대원과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산속 도로, 즉 ‘임도’의 부족은 이번에도 산불 진화를 어렵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임도는 산 1ha당 4.1m 수준, 독일(54m)이나 일본(24.1m)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지상 진화 대원들이 불을 끄는 방법들은 이 산불이 이쪽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분리 작업을 하는 것이 있고 낙엽층 속에 있는 불씨를 찾아내는 찾아내서 끄는 작업이 있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요. 이게 다 수작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작업 지상 진화 작업 손작업을 하는 인력들을 그 산불이 나고 있는 지상 진화 작업 현장에 투입해야 하겠죠. 길이 없습니다. 전부 10kg이 넘는 물 짐을 지고 고령인 분들이 이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힘이 다 빠져버리고요. |
부족한 임도는 산불 예방 진화대의 고령화, 미흡한 장비와 맞물려 이들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산불 현장에 투입된 60대 예방 진화대원 3명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임도를 이용한 지상 진화 작업이 어려운 만큼, 현재 산불 진압은 대부분 헬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헬기는 야간 화재 진압이 어렵고, 낮에도 바람이나 안개가 심하면 진화에 나서기 곤란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마저도 수적으로 부족한 데다 노후화돼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현재 산림청이 보유한 산불 진압 헬기는 50대, 이 중 33대가 20년이 넘은 노후 헬기입니다.
지자체마다 민간에서 헬기를 임차해 활용하고 있지만, 최근까지 추락 사고가 잇따르면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불은 진화 작업이 더딘 밤사이 빠른 속도로 번지기 때문에, 야간작업이 가능하고 담수량도 많은 고정익 항공기 도입 등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앞서 2019년과 2022년, 강원 고성과 경북 울진 등 대형 산불 당시에도 인력 부족, 장비 노후화 문제는 여러 번 지적됐습니다.
이후 해마다 수립되는 정부의 ‘산불종합대책’은 기후 변화로 인해 산불이 대형화, 상시화할 것이라는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최대 규모의 산불, 최악의 피해에서 드러나듯 각종 개선책 이행률은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영남 산불은 예견된 ‘재앙’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병두/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난연구부장 기후 변화와 산불이 결합하면 그 파괴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기존과 같은 대응 방식, 기존과 같은 자원을 가지고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산불의 파괴력에 맞춰서 다시 재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산불의 시대는 이제 가고 새로운 초대형 산불의 시대가 이번 산불을 계기로 열렸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삶의 터전을 복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당장 산불로 황폐화한 땅은 여름 장마처럼 곧 닥칠 기후 위기에 또 다른 재난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산불로 이 나무들이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뿌리의 응집력이 흙을 붙잡고 있는 응집력이 떨어지다 보니까 폭우가 내리면 흙들이 쓸려 내려와서 산사태가 난다. 불에 탄 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저대로 두면 저 나무가 쓰러지면서 흙들을 일으키고 흙들을 훼손해서 그곳에 빗물이 가해지면 큰 산사태를 야기한다는 겁니다. |

대형 산불로 생겨난 온실가스가 고온건조한 기후를 만들고, 더 큰 산불을 유발하는 악순환도 우려됩니다.
이번 봄, 한반도를 덮쳤던 산불은 어쩌면 다가올 더 큰 재난의 경고가 아닐까요?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산불은 언제나 괴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이제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더 대형화되고 역대급이라고 얘기하니까 괴물이라고 표현하지만, 산불은 한 번도 순한 애완동물인 적이 없었다. 항상 괴물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안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역할 또 우리가 정말 안전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부분들에 반성의 기회로도 반드시 삼아야 한다는 부분들 그래서 국민의 노력 없이는 산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
#산불 #재난 #고령층 #헬기 #임도 #고정익 #영남 #노인 #인명피해 #괴물 산불 #검은 봄 #이재민 #대피
취재:강병수
촬영:강우용
촬영기자:임현식
편집:이기승
그래픽:장수현 이시영
리서처:채희주
조연출:심은별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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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보다] ‘검은 봄’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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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4-13 23:11:31
지난 3월 하순, 영남 지역을 덮친 초대형 산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구덩이 속 목숨을 건 피난, 그리고 멈출 수 없었던 화마와의 사투.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이른바 ‘괴물 산불’은 이제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북 의성군에서 처음 산불이 시작된 건 지난달 22일, 순간 최대풍속 초속 27m에 이르는 태풍급 강풍은 불씨를 사방으로 흩날렸습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도깨비 불’에 산불은 순식간에 인근의 안동과 영양, 청송으로 번졌고, 사흘 만에 경북 영덕군의 해안가 마을까지 불태웠습니다.
피해 지역 곳곳에서 필사의 탈출이 이뤄졌고,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산불 진압 작전이 진행됐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건조한 서풍과 함께 바싹 마른 낙엽들이 ‘연료’ 역할을 하며, 갈수록 불길이 거세졌습니다.
이병두/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난연구부장 이번 산불 같은 경우는 고온 건조 바람 그리고 숲이 한꺼번에 조합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평년보다 10도나 높은 고온이 있었고요. 여기 이 상태에서 강한 바람이 들어왔었고요. 또 해당 지역에는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어우러져서 가장 빠른 그리고 가장 파괴적인 산불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
산불이 난 지 열흘이 지나서야 진압된 영남권 대형 산불,
축구장 4,600개 면적을 잿더미로 만들며 이제껏 보지 못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주민과 산불 전문 예방진화대원, 헬기 조종사까지 31명이 숨지는 등 8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주택과 창고, 사찰 등 6천 채가 넘는 건물이 화마에 삼켜졌습니다.
재산 피해는 2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악의 산불에 사람들 마음에도 검은 재가 내려앉았습니다.
산불 진압 이틀 뒤, 화마가 휩쓸고 간 마을을 찾았습니다.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이 마을은 이번 산불로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탔습니다.

마을 곳곳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탈 때까지 다 타버린 지붕은 폭삭 주저앉았고, 100년 넘게 주민들과 함께해온 교회도 검게 탄 흉물이 됐습니다.
제대로 된 옷 한 벌, 수저 하나 챙겨 나올 수 없었던 그날.

마부진/경북 의성군 단촌면 피란 갔다 올 때보다 더 해요. 6.25 사변 때보다. 6.25 사변 때는 끓여 먹을 때 밥이라도 가지고 나왔죠. 이번엔 숟가락도 숟가락 한 개 못 가지고 나왔어. 그때는 우리 피란 갔을 때 냄비하고 숟가락하고는 가지고 나와서 끓여 먹고 집에 들어와서 끓여 먹었지만 지금 숟가락 한 개 다 타버리고 없어요. |
평생의 추억이 담긴 집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할아버지는 눈물조차 말라버렸습니다.
피해가 큰 만큼 복구 작업도 섣불리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 이재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말임/경북 의성군 단촌면 내가 여기 시집와서 22살에 와서 55년이나 됐는데, 지금 일흔여덟이니까 그래 됐는데. 그걸 거기 다 묻어버리니까 (평생 계셨던 집인데)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서 못 해요. 권영순/경북 영양군 석보면 저녁 먹다가 밥숟가락 하나 들었다가 이장이 이 회관으로 피하라고 하는데 불이 막 양쪽으로 다 와서 이 앞에 다 타는데. 눈을 뜰 수 있어야 뭘 꺼내든지 하지. 내 살아야 한다 싶어서. 팔십 평생 살다가 이런 일도 있습니까. 너무 참혹한 일이 있어서. |
농번기를 앞두고 닥친 산불은 묘목도 농기계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나마 성한 농기구로 애써 내일을 준비하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주쌍옥/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사도 하긴 해야 하는데. 전기도 없고. 기계도 농기구 이런 것도. 건조기 이런 거 다 타버렸잖아요. 건조기 없는데 고추 농사를 어떻게 하나요. 사과나무도 심으려고 했는데 이거 다 못쓰게 됐고. 이렇게 고루고루 탄 곳이 없어요. 집이 안 타면 밭이 타고, 밭이 안타면 산이 타고. 가면서 전부 다 불길이 안 지나간 자리가 없어요. 사람이 불 내려고 해도 이렇게 못 내거든요. |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모인 곳은 임시 대피소.
취재진은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차가운 바닥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이재민 대부분은 노인들이었습니다.

이번 산불 피해는 특히 농촌의 노인 등 취약계층에 집중됐습니다.
산불 사망자 31명 중 60대 이상 고령층은 29명으로, 고령화된 인구 소멸 지역이 재난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산불이 보여준 겁니다.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대부분 대피하는 과정 혹은 대피하지 못해서 손상 이런 상황에서 이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건 우리가 굉장히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똑같은 대피 명령을 받고 똑같이 대피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기민하게 대피하시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거고요 |
실제 고령층 사망자 대부분은 제대로 대피하지 못한 채, 집 근처나 차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산불 발생 당시 주민들의 대피를 위해 천 건이 넘는 재난 문자가 발송됐지만, 대피 장소는 수시로 바뀌었고, 이마저도 통신이 끊기거나 구형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고령층에겐 잘 닿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대형화된 산불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재난 경보 시스템의 구멍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이번 초대형 산불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고령층이 대부분인 농촌에선 마을 이장의 안내 방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이장이 상황을 늦게 인식하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현실,
정부와 지자체의 경보와 대피 시스템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사실 훨씬 더 선제적인 대피를 하시는 게 중요하거든요. 확산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라면 사실 이분들은 대피 명령 이전에라도 우선 먼저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시킬 수 있게끔 하는 체계가 어떻게 보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이런 것들에 따라주실 수 있는 '이런 사회적인 합의 이런 것들도 필요한 상황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
열흘 동안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곳곳을 불태웠던 산불,
다시 찾아간 피해 현장에선 현재 산불 대응 시스템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불에 타기 쉬운 소나무 같은 침엽수들이 빽빽했던 산, 불이 붙기 시작하자 거대한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숲이 매우 과밀하다는 겁니다. 연료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 불에 탔는데도 이 정도인데. ‘불타기 전에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잡목이 우거져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료 물질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불이 붙으면 굉장히 큰 불길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고요. |
불은 순식간에 타올라 빠르게 확산했지만, 진압대원과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산속 도로, 즉 ‘임도’의 부족은 이번에도 산불 진화를 어렵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임도는 산 1ha당 4.1m 수준, 독일(54m)이나 일본(24.1m)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지상 진화 대원들이 불을 끄는 방법들은 이 산불이 이쪽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분리 작업을 하는 것이 있고 낙엽층 속에 있는 불씨를 찾아내는 찾아내서 끄는 작업이 있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요. 이게 다 수작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작업 지상 진화 작업 손작업을 하는 인력들을 그 산불이 나고 있는 지상 진화 작업 현장에 투입해야 하겠죠. 길이 없습니다. 전부 10kg이 넘는 물 짐을 지고 고령인 분들이 이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힘이 다 빠져버리고요. |
부족한 임도는 산불 예방 진화대의 고령화, 미흡한 장비와 맞물려 이들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산불 현장에 투입된 60대 예방 진화대원 3명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임도를 이용한 지상 진화 작업이 어려운 만큼, 현재 산불 진압은 대부분 헬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헬기는 야간 화재 진압이 어렵고, 낮에도 바람이나 안개가 심하면 진화에 나서기 곤란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마저도 수적으로 부족한 데다 노후화돼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현재 산림청이 보유한 산불 진압 헬기는 50대, 이 중 33대가 20년이 넘은 노후 헬기입니다.
지자체마다 민간에서 헬기를 임차해 활용하고 있지만, 최근까지 추락 사고가 잇따르면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불은 진화 작업이 더딘 밤사이 빠른 속도로 번지기 때문에, 야간작업이 가능하고 담수량도 많은 고정익 항공기 도입 등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앞서 2019년과 2022년, 강원 고성과 경북 울진 등 대형 산불 당시에도 인력 부족, 장비 노후화 문제는 여러 번 지적됐습니다.
이후 해마다 수립되는 정부의 ‘산불종합대책’은 기후 변화로 인해 산불이 대형화, 상시화할 것이라는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최대 규모의 산불, 최악의 피해에서 드러나듯 각종 개선책 이행률은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영남 산불은 예견된 ‘재앙’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병두/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난연구부장 기후 변화와 산불이 결합하면 그 파괴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기존과 같은 대응 방식, 기존과 같은 자원을 가지고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산불의 파괴력에 맞춰서 다시 재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산불의 시대는 이제 가고 새로운 초대형 산불의 시대가 이번 산불을 계기로 열렸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삶의 터전을 복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당장 산불로 황폐화한 땅은 여름 장마처럼 곧 닥칠 기후 위기에 또 다른 재난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현철/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산불로 이 나무들이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뿌리의 응집력이 흙을 붙잡고 있는 응집력이 떨어지다 보니까 폭우가 내리면 흙들이 쓸려 내려와서 산사태가 난다. 불에 탄 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저대로 두면 저 나무가 쓰러지면서 흙들을 일으키고 흙들을 훼손해서 그곳에 빗물이 가해지면 큰 산사태를 야기한다는 겁니다. |

대형 산불로 생겨난 온실가스가 고온건조한 기후를 만들고, 더 큰 산불을 유발하는 악순환도 우려됩니다.
이번 봄, 한반도를 덮쳤던 산불은 어쩌면 다가올 더 큰 재난의 경고가 아닐까요?
이영주/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산불은 언제나 괴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이제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더 대형화되고 역대급이라고 얘기하니까 괴물이라고 표현하지만, 산불은 한 번도 순한 애완동물인 적이 없었다. 항상 괴물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안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역할 또 우리가 정말 안전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부분들에 반성의 기회로도 반드시 삼아야 한다는 부분들 그래서 국민의 노력 없이는 산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
#산불 #재난 #고령층 #헬기 #임도 #고정익 #영남 #노인 #인명피해 #괴물 산불 #검은 봄 #이재민 #대피
취재:강병수
촬영:강우용
촬영기자:임현식
편집:이기승
그래픽:장수현 이시영
리서처:채희주
조연출:심은별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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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수 기자 kbs03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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