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백발이 된 소년병…“전쟁 잊을까”

입력 2025.06.28 (08:36) 수정 2025.06.2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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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수요일은 6.25 전쟁 발발 7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50년, 한반도를 덮친 전쟁의 소용돌이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데요.

군인뿐 아니라, 어린 학생과 민간인까지 비극의 한가운데로 휘말려 들어갔고, 그중에는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참전한 중학생 소년병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소년병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점점 세월 속에 잊혀갔는데요.

그들에게 전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오늘은 75년 전, 전쟁터에 섰던 한 소년병의 삶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1950년 6월, 전쟁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포화 속에 일상을 잃어버린 이들.

그 중엔 전쟁 초기 불리한 전황 속에 정규군으로 자원입대한 소년병이 있었습니다.

[정영훈/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국 국장/2024년 : "아동 소년병에 대해서 법적 근거 없이 입대 혹은 징집을 시켜서 군 복무를 시킨 점이 인권침해를 한 것으로 봐 조사개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진실화해위원회는 소년병에 대한 실질적 명예 회복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 전쟁.

그 한복판엔 총을 든 어린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열여섯 살의 나이로 참전했던 한 소년병을 만나 우리가 잊고 있엇던 그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천의 한 요양 병원.

이곳에서 백발의 노병, 이경종 씨와 마주합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전선에 나섰던 소년은 이제 아흔 한살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어르신 혹시 오늘 며칠인지 아세요?) 6월 25일. (맞아요.) 아, 6.25."]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데요.

[이영식/요양병원 병원장 : "연세가 있으셔서 생겨나는 그런 기억력이 없어지는 증세가 좀 있어요."]

아직 75년 전의 기억만큼은 선명합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군번을 새로 줬어. 그래서 그 군번 가지고 만 4년 동안을 (참전해서) 16살에 들어가서 20살 때 제대했어."]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군모를 쓴 앳된 소년이 보입니다.

16살 소년병 시절, 강원도 향로봉 전투 중 찍은 사진입니다.

한창 가족의 품이 그리울 나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강행한 군 생활은 무척이나 고단했습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싸우고 하는데 밥을 제대로 주질 않아서 못 했어. 그래서 막 굶고 그랬어. (그러면 그렇게 힘들었을 때 누가 제일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후유증도 깊게 남았는데요.

[이승표/손자 : "향로봉 전투 때 허리를 좀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여파로 전역하고 나서도 허리가 계속 안 좋으셔서..."]

전쟁과 부상으로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꿈.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5학년, 6학년 때 축구 선수 돼 가지고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였었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이 할아버지는 전역 후 일용직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순탄치 않은 삶이 이어졌지만, 당시의 선택엔 여한이 없습니다.

["(다시 전쟁이 나면 또 소년병이 되실 거예요?) 그럼. 소년병을 해서 나라를 이렇게 살려놨잖아. 그러니까 항상 또 전쟁이 나면 또 군인 하지."]

이경종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합니다.

["(어르신 어디 가는지 아세요?) 몰라. (지금 우리 치과 가는데?) 어디? (치과!) 치과? 이규원 치과?"]

구급차에 몸을 싣고 아들 이규원 씨가 운영하는 치과 건물로 향합니다.

늘 그리웠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인사를 건넵니다.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늙었네. (염색도 많이 하고 파마도 열심히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보고 싶었어. (저도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이곳은 치과의사 이규원 씨가 운영 중인 '소년병 기록관'입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여기 오니까 어떠세요?) 아주, 좋아. 치과하는 아들이 6.25 전쟁 때 (기록) 찾아야 한다고 해서 아들하고 같이 다니면서 일일이 기억하고 사진 찍고 하면서 다닌 거야. 그 (기록을) 줬더니 이렇게 만들어 놨어."]

6.25 전쟁 발발 75년.

조금씩 잊혀져 가는 기억들을 붙들어 간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텐데요.

여기 소년병들을 기억하고 또 기록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온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까요?

국방부 추산에 따르면, 만 17세 이하 소년병 참전자는 약 3만 명.

기록관에서 파악한 인천 소년병은 2,393명입니다.

기록물을 보는 이 할아버지의 눈빛이 또렷해지는데요.

["고 윤운철, 17세에 참전해서 20세에 전사한 기록을 남겨놓은 거야."]

이경종, 이규원 부자는 1996년도부터 알음알음 연락이 닿은 소년병들의 기록을 직접 수집해 왔습니다.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인천에서 많은 학생이 중학생들과 같이 갔는데 몇 명이 갔는지도 모르겠고 또 몇 명이 죽었는지도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아버지 한번 찾아보시죠. 그 세월이 30년 됐죠. 그래서 400여 분 만나 뵙고 돌아가신 분은 150명 찾아냈고 소년병들. 그리고 한 200여 분은 녹음을 하고."]

치과의사인 이규원 원장은 바쁜 진료 일정에도 2004년부터 틈틈이 기록관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아주 잘 만들었다.) 저희 잘 만들었어요, 아버지."]

관장실 한 편, 빼곡히 쌓인 서류와 테이프들.

["이건 저희 가보 1호입니다. 아버지께서 참여하신 분 한분 한분 만나서 녹음한 녹음기, 녹음 테이프."]

테이프에는 소년병들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박제훈/6.25참전 소년병/2005년 녹음 : "그때는 14살이었죠. 전쟁이라는 걸 알았나요."]

전쟁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내가 살아 돌아왔는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는데 그럼 내가 왜 살아 돌아왔을까. 그 스무살 어린 나이에 그걸 오랫동안 생각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더 많은 세대가 소년병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전하는데요.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우리가 어린애들도 14살짜리도 전쟁터에 가야 될 때가 없어야 되지만 과거에 있었다.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준비해서 소년병이 없게 해야죠. 전쟁을 잊으면 또 평화는 잃어버리는 거거든요."]

올해 태어난 증손주 사진을 바라보는 이경종 할아버지.

또 다른 소년들이 자라나고 있는 이 땅에서, 잊혀져 간 소년병 전우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평화의 시대를 염원합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전우야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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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백발이 된 소년병…“전쟁 잊을까”
    • 입력 2025-06-28 08:36:25
    • 수정2025-06-28 08: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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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수요일은 6.25 전쟁 발발 7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50년, 한반도를 덮친 전쟁의 소용돌이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데요.

군인뿐 아니라, 어린 학생과 민간인까지 비극의 한가운데로 휘말려 들어갔고, 그중에는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참전한 중학생 소년병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소년병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점점 세월 속에 잊혀갔는데요.

그들에게 전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오늘은 75년 전, 전쟁터에 섰던 한 소년병의 삶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1950년 6월, 전쟁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포화 속에 일상을 잃어버린 이들.

그 중엔 전쟁 초기 불리한 전황 속에 정규군으로 자원입대한 소년병이 있었습니다.

[정영훈/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국 국장/2024년 : "아동 소년병에 대해서 법적 근거 없이 입대 혹은 징집을 시켜서 군 복무를 시킨 점이 인권침해를 한 것으로 봐 조사개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진실화해위원회는 소년병에 대한 실질적 명예 회복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 전쟁.

그 한복판엔 총을 든 어린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열여섯 살의 나이로 참전했던 한 소년병을 만나 우리가 잊고 있엇던 그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천의 한 요양 병원.

이곳에서 백발의 노병, 이경종 씨와 마주합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전선에 나섰던 소년은 이제 아흔 한살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어르신 혹시 오늘 며칠인지 아세요?) 6월 25일. (맞아요.) 아, 6.25."]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데요.

[이영식/요양병원 병원장 : "연세가 있으셔서 생겨나는 그런 기억력이 없어지는 증세가 좀 있어요."]

아직 75년 전의 기억만큼은 선명합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군번을 새로 줬어. 그래서 그 군번 가지고 만 4년 동안을 (참전해서) 16살에 들어가서 20살 때 제대했어."]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군모를 쓴 앳된 소년이 보입니다.

16살 소년병 시절, 강원도 향로봉 전투 중 찍은 사진입니다.

한창 가족의 품이 그리울 나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강행한 군 생활은 무척이나 고단했습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싸우고 하는데 밥을 제대로 주질 않아서 못 했어. 그래서 막 굶고 그랬어. (그러면 그렇게 힘들었을 때 누가 제일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후유증도 깊게 남았는데요.

[이승표/손자 : "향로봉 전투 때 허리를 좀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여파로 전역하고 나서도 허리가 계속 안 좋으셔서..."]

전쟁과 부상으로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꿈.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5학년, 6학년 때 축구 선수 돼 가지고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였었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이 할아버지는 전역 후 일용직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순탄치 않은 삶이 이어졌지만, 당시의 선택엔 여한이 없습니다.

["(다시 전쟁이 나면 또 소년병이 되실 거예요?) 그럼. 소년병을 해서 나라를 이렇게 살려놨잖아. 그러니까 항상 또 전쟁이 나면 또 군인 하지."]

이경종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합니다.

["(어르신 어디 가는지 아세요?) 몰라. (지금 우리 치과 가는데?) 어디? (치과!) 치과? 이규원 치과?"]

구급차에 몸을 싣고 아들 이규원 씨가 운영하는 치과 건물로 향합니다.

늘 그리웠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인사를 건넵니다.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늙었네. (염색도 많이 하고 파마도 열심히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보고 싶었어. (저도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이곳은 치과의사 이규원 씨가 운영 중인 '소년병 기록관'입니다.

[이경종/6.25 참전 소년병 : "(여기 오니까 어떠세요?) 아주, 좋아. 치과하는 아들이 6.25 전쟁 때 (기록) 찾아야 한다고 해서 아들하고 같이 다니면서 일일이 기억하고 사진 찍고 하면서 다닌 거야. 그 (기록을) 줬더니 이렇게 만들어 놨어."]

6.25 전쟁 발발 75년.

조금씩 잊혀져 가는 기억들을 붙들어 간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텐데요.

여기 소년병들을 기억하고 또 기록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온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까요?

국방부 추산에 따르면, 만 17세 이하 소년병 참전자는 약 3만 명.

기록관에서 파악한 인천 소년병은 2,393명입니다.

기록물을 보는 이 할아버지의 눈빛이 또렷해지는데요.

["고 윤운철, 17세에 참전해서 20세에 전사한 기록을 남겨놓은 거야."]

이경종, 이규원 부자는 1996년도부터 알음알음 연락이 닿은 소년병들의 기록을 직접 수집해 왔습니다.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인천에서 많은 학생이 중학생들과 같이 갔는데 몇 명이 갔는지도 모르겠고 또 몇 명이 죽었는지도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아버지 한번 찾아보시죠. 그 세월이 30년 됐죠. 그래서 400여 분 만나 뵙고 돌아가신 분은 150명 찾아냈고 소년병들. 그리고 한 200여 분은 녹음을 하고."]

치과의사인 이규원 원장은 바쁜 진료 일정에도 2004년부터 틈틈이 기록관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아주 잘 만들었다.) 저희 잘 만들었어요, 아버지."]

관장실 한 편, 빼곡히 쌓인 서류와 테이프들.

["이건 저희 가보 1호입니다. 아버지께서 참여하신 분 한분 한분 만나서 녹음한 녹음기, 녹음 테이프."]

테이프에는 소년병들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박제훈/6.25참전 소년병/2005년 녹음 : "그때는 14살이었죠. 전쟁이라는 걸 알았나요."]

전쟁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내가 살아 돌아왔는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는데 그럼 내가 왜 살아 돌아왔을까. 그 스무살 어린 나이에 그걸 오랫동안 생각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더 많은 세대가 소년병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전하는데요.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 : "우리가 어린애들도 14살짜리도 전쟁터에 가야 될 때가 없어야 되지만 과거에 있었다.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준비해서 소년병이 없게 해야죠. 전쟁을 잊으면 또 평화는 잃어버리는 거거든요."]

올해 태어난 증손주 사진을 바라보는 이경종 할아버지.

또 다른 소년들이 자라나고 있는 이 땅에서, 잊혀져 간 소년병 전우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평화의 시대를 염원합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전우야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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