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 꽂지 마” 비난전에…연봉 1위 기업의 몰락

입력 2025.08.13 (07:01) 수정 2025.08.13 (09:5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금융권을 제외한 매출액 100대 기업 가운데, 지난해 직원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기업은 여천NCC였고…"

14년 전인 2011년, KBS 뉴스 속 여천NCC는 평균 연봉 1위 기업이었습니다.

1999년 한화와 DL그룹이 나프타분해설비를 통합하면서 만든 합작사, 여천NCC는 나프타를 가지고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만드는 석유화학 소재 기업입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에틸렌 생산 규모로 국내 3위의 여천NCC.

에틸렌 등 생산품을 구매해 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라는 든든한 모기업도 갖춰 석유화학 산업 성장세를 타고 꾸준히 좋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 때문에 2017년까지도 500대 기업 중 평균 연봉 1위가 여천 NCC라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 2017년엔 매출액 5조 4천억 원에 1조 원 넘는 영업이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3년 전부터 적자 전환…중국산 저가 공세에 업계 '시름'

하지만 3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석유화학업계가 기술력을 갖춰 저렴한 물량을 세계 시장에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레 우리 석유화학 기업들의 수출이 줄었고, 중국산 저가 물량은 국내 시장까지 잠식했습니다.

2021년 3,871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던 여천NCC는 이듬해인 2022년 3,867억 원의 적자를 냈고,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적자이다보니 여파는 여천NCC에만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석유화학 기업들 역시 2022년을 기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화학산업협회가 집계한 석유화학업계 주요 9개 사의 합산 영업이익도 2021년 7조 원이 넘었지만, 2022년 약 27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이 적자 폭이 지난해엔 1조 4천억 원 수준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같은 누적 적자에 문 닫는 공장도 늘었습니다.

여수산단에선 LG화학과 롯데케미칼 일부 생산라인이 문을 닫았고, 울산산단에선 효성화학 등 10개 사 일부 라인이 생산을 멈췄습니다.


중국산 저가 공세를 피하기 위한 고부가 제품 생산에 힘쓰는 한편, 일각에선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실제로 대산산단에선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통폐합을 준비 중입니다.

■2천억 수혈 반년도 안돼 "3천억 필요"…불거진 대주주 간 갈등

여천NCC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딱 50%씩 보유하고 있는 합작사입니다.

이 때문에 대표도 양측이 각각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이사 수도 동일합니다. 함께 경영에 참여하고, 함께 이익도 나눕니다.

최근 20여 년간 벌어온 이익으로 인한 누적 배당금은 4조 4천억 원에 달하는데, 이 또한 지분율에 따라 똑같이 2조 2천억 원씩 나눠 받았습니다.

하지만 누적 적자로 자금난에 빠지면서 한화와 DL그룹, 두 모기업 간 입장이 갈렸습니다.

3월 2천억 원의 자금이 부족해 양사가 각각 천억 원씩 투입했는데, 또다시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 되자 두 기업이 다른 반응을 보인 겁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 7월 천5백억 원의 추가 자금 지원을 승인했습니다.

여천NCC를 살려야 하니 돈이 필요하다며, DL그룹도 추가 자금 지원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DL케미칼은 부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상황 파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저가 수주' 두고 갈등…국세청 추징금 천억 원 두고 '진흙탕' 다툼

DL그룹이 먼저 한화가 저가 수주로 여천NCC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DL그룹은 11일 입장 자료를 통해 "한화는 여천NCC의 이익을 깎아서라도 한화에만 유리한 조건을 고집해 왔다고 한다"면서 "한화그룹의 무책임한 '모럴해저드'로 여천NCC의 경쟁력과 자생력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천NCC가 만드는 에틸렌을 한화가 싸게 공급받으면서 회사가 힘들어졌는데, 이걸 함께 책임져야 하냐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이에 한화 측은 최근 여천NCC가 국세청으로부터 천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걸 구체적으로 공개하며, 오히려 DL그룹이 저가 수주로 국세청 추징금까지 부과받았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한화 측은 입장 자료를 통해 "올해 초 여천NCC는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에틸렌, C4R1 등 제품의 저가 공급으로 법인세 등 추징액 1천6억 원을 부과받았다"면서 "DL과의 거래로 발생한 추징액이 962억 원(96%), 한화와의 거래는 44억 원(4%)"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이 같은 저가 수주 행태는 "DL케미칼이 여천NCC에 빨대를 꽂아 이익을 취하겠다는 말과 다름 없다"고도 비난했습니다.

DL그룹이 "한화 그룹 저가 수주로 여천NCC가 힘들어졌다"고 비판하자, 아예 국세청 추징금 부과 받은 걸 공개하며 'DL 그룹 저가 수주가 진짜 문제'라는 취지로 반박하며 책임을 서로 떠넘긴 겁니다.

국세청 추징금 부과에 대해 DL케미칼은 "지난 2007년에도 거의 똑같은 '저가 수주'에 대한 추징금 부과가 있었는데, 당시 불복 소송으로 2009년 11월 대법원에서 추징금 부과를 취소하는 결정을 받아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여천NCC가 추징금 부과에 불복해 조세심판원 등을 통해 법적 대응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추징금을 부과받은 여천NCC가 추징금이 부당하다고 법적 대응에 나선 상황에서, 모기업들이 국세청의 '저가 수주 추징금 부과'를 꺼내들어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국세청 입장에선 이 다툼 덕에 여천NCC와의 과세 분쟁 과정에서 "모기업인 한화 측도 인정한 '저가 수주'"라고 주장할 만한 대목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자금 지원, 길은 열렸지만…'밑빠진 독' 석유화학 앞길은?

11일 DL그룹이 DL케미칼에 대한 2천억 원 유상증자를 결정하면서 여천NCC에 대한 자금 지원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DL 측은 아직 여천NCC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 의사를 명확히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긴급수혈을 받아 이번에 위기를 넘긴다 해도,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두 모기업이 손잡고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 지원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김종호 화섬식품노조 여천NCC 지회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여천NCC로부터 공급을 받는 회사가 4군데 쯤 되는데, 이 회사들이 원료를 저가에 구매하지 못 하게 될 거고, 결국 다른 자본이나 중국 자본에서 공급받게 될 것"이라며, "이게 우리나라 석유화학의 경영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천NCC의 위기가 자칫 벼랑끝 석유화학 업계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빨대 꽂지 마” 비난전에…연봉 1위 기업의 몰락
    • 입력 2025-08-13 07:01:47
    • 수정2025-08-13 09:55:43
    심층K

"금융권을 제외한 매출액 100대 기업 가운데, 지난해 직원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기업은 여천NCC였고…"

14년 전인 2011년, KBS 뉴스 속 여천NCC는 평균 연봉 1위 기업이었습니다.

1999년 한화와 DL그룹이 나프타분해설비를 통합하면서 만든 합작사, 여천NCC는 나프타를 가지고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만드는 석유화학 소재 기업입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에틸렌 생산 규모로 국내 3위의 여천NCC.

에틸렌 등 생산품을 구매해 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라는 든든한 모기업도 갖춰 석유화학 산업 성장세를 타고 꾸준히 좋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 때문에 2017년까지도 500대 기업 중 평균 연봉 1위가 여천 NCC라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 2017년엔 매출액 5조 4천억 원에 1조 원 넘는 영업이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3년 전부터 적자 전환…중국산 저가 공세에 업계 '시름'

하지만 3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석유화학업계가 기술력을 갖춰 저렴한 물량을 세계 시장에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레 우리 석유화학 기업들의 수출이 줄었고, 중국산 저가 물량은 국내 시장까지 잠식했습니다.

2021년 3,871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던 여천NCC는 이듬해인 2022년 3,867억 원의 적자를 냈고,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적자이다보니 여파는 여천NCC에만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석유화학 기업들 역시 2022년을 기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화학산업협회가 집계한 석유화학업계 주요 9개 사의 합산 영업이익도 2021년 7조 원이 넘었지만, 2022년 약 27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이 적자 폭이 지난해엔 1조 4천억 원 수준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같은 누적 적자에 문 닫는 공장도 늘었습니다.

여수산단에선 LG화학과 롯데케미칼 일부 생산라인이 문을 닫았고, 울산산단에선 효성화학 등 10개 사 일부 라인이 생산을 멈췄습니다.


중국산 저가 공세를 피하기 위한 고부가 제품 생산에 힘쓰는 한편, 일각에선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실제로 대산산단에선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통폐합을 준비 중입니다.

■2천억 수혈 반년도 안돼 "3천억 필요"…불거진 대주주 간 갈등

여천NCC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딱 50%씩 보유하고 있는 합작사입니다.

이 때문에 대표도 양측이 각각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이사 수도 동일합니다. 함께 경영에 참여하고, 함께 이익도 나눕니다.

최근 20여 년간 벌어온 이익으로 인한 누적 배당금은 4조 4천억 원에 달하는데, 이 또한 지분율에 따라 똑같이 2조 2천억 원씩 나눠 받았습니다.

하지만 누적 적자로 자금난에 빠지면서 한화와 DL그룹, 두 모기업 간 입장이 갈렸습니다.

3월 2천억 원의 자금이 부족해 양사가 각각 천억 원씩 투입했는데, 또다시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 되자 두 기업이 다른 반응을 보인 겁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 7월 천5백억 원의 추가 자금 지원을 승인했습니다.

여천NCC를 살려야 하니 돈이 필요하다며, DL그룹도 추가 자금 지원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DL케미칼은 부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상황 파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저가 수주' 두고 갈등…국세청 추징금 천억 원 두고 '진흙탕' 다툼

DL그룹이 먼저 한화가 저가 수주로 여천NCC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DL그룹은 11일 입장 자료를 통해 "한화는 여천NCC의 이익을 깎아서라도 한화에만 유리한 조건을 고집해 왔다고 한다"면서 "한화그룹의 무책임한 '모럴해저드'로 여천NCC의 경쟁력과 자생력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천NCC가 만드는 에틸렌을 한화가 싸게 공급받으면서 회사가 힘들어졌는데, 이걸 함께 책임져야 하냐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이에 한화 측은 최근 여천NCC가 국세청으로부터 천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걸 구체적으로 공개하며, 오히려 DL그룹이 저가 수주로 국세청 추징금까지 부과받았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한화 측은 입장 자료를 통해 "올해 초 여천NCC는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에틸렌, C4R1 등 제품의 저가 공급으로 법인세 등 추징액 1천6억 원을 부과받았다"면서 "DL과의 거래로 발생한 추징액이 962억 원(96%), 한화와의 거래는 44억 원(4%)"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이 같은 저가 수주 행태는 "DL케미칼이 여천NCC에 빨대를 꽂아 이익을 취하겠다는 말과 다름 없다"고도 비난했습니다.

DL그룹이 "한화 그룹 저가 수주로 여천NCC가 힘들어졌다"고 비판하자, 아예 국세청 추징금 부과 받은 걸 공개하며 'DL 그룹 저가 수주가 진짜 문제'라는 취지로 반박하며 책임을 서로 떠넘긴 겁니다.

국세청 추징금 부과에 대해 DL케미칼은 "지난 2007년에도 거의 똑같은 '저가 수주'에 대한 추징금 부과가 있었는데, 당시 불복 소송으로 2009년 11월 대법원에서 추징금 부과를 취소하는 결정을 받아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여천NCC가 추징금 부과에 불복해 조세심판원 등을 통해 법적 대응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추징금을 부과받은 여천NCC가 추징금이 부당하다고 법적 대응에 나선 상황에서, 모기업들이 국세청의 '저가 수주 추징금 부과'를 꺼내들어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국세청 입장에선 이 다툼 덕에 여천NCC와의 과세 분쟁 과정에서 "모기업인 한화 측도 인정한 '저가 수주'"라고 주장할 만한 대목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자금 지원, 길은 열렸지만…'밑빠진 독' 석유화학 앞길은?

11일 DL그룹이 DL케미칼에 대한 2천억 원 유상증자를 결정하면서 여천NCC에 대한 자금 지원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DL 측은 아직 여천NCC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 의사를 명확히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긴급수혈을 받아 이번에 위기를 넘긴다 해도,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두 모기업이 손잡고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 지원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김종호 화섬식품노조 여천NCC 지회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여천NCC로부터 공급을 받는 회사가 4군데 쯤 되는데, 이 회사들이 원료를 저가에 구매하지 못 하게 될 거고, 결국 다른 자본이나 중국 자본에서 공급받게 될 것"이라며, "이게 우리나라 석유화학의 경영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천NCC의 위기가 자칫 벼랑끝 석유화학 업계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