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사건건] 광복 80주년에도 광복을 맞지 못한 사람들

입력 2025.08.14 (15:59) 수정 2025.08.1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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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시간 : 8월 14일(목) 16:00~17:00 KBS1
■ 진행 : 김용준 기자
■ 출연 : 박광일 / 역사작가 · 김월배 / 하얼빈이공대 교수 · 김창록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https://youtu.be/ZQgfBXB91iE

◎김용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8월 14일 목요일 특집 사사건건입니다. 사사건건은 광복 80주년을 꼭 하루 앞두고 특별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날이 광복절이죠. 하지만 여전히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또 이름 없이 사라진 영혼들 그리고 정신적인 광복과 자유를 꿈꾸는 이들인데요. 그런데 광복은 끝난 역사가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현재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집 사사건건,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 그들의 목소리를 출연자분들과 함께 전해봅니다. 우선 역사 현장을 누비면서 대중에게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해 주시는 선 넘는 한국사의 저자 박광일 역사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박광일: 안녕하세요?

◎김용준: 안녕하십니까? 일단 저희 일반 시청자나 대중분들도 의미가 남다르겠지만 역사학자로서의 광복 80주년, 어떤 의미를 갖나요?

▼박광일: 광복 80주년인데 올해가 간지 해로 치면 을사년이 됩니다. 1905년, 우리가 국권을 빼앗겼던 시기가 바로 을사늑약이니까...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것과 연결해서 볼 수도 있기도 하고요. 또 한편으로 다시 일본과 국교를 수립했던 1965년이 또 을사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사의 매듭을 묶였다가 다시 풀어내는 그런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올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더불어도 광복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왔던 우리의 전통 역사가 36년 동안 끊겼던 것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던 게 1945년에 시작이라면 그 하나의 의미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친일 잔재 청산하지 못했던 부분들, 안타까운 어떤 역사에 대한 부분들을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향점, 즉 민주공화정 체제의 국가 건설이라고 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광복 직후에, 1948년에 정부 수립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2개의 지향점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러니까 광복 80년은 새로운 시작의 두 가지, 하나는 단절된 것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시작을 살펴보는 이 두 가지를 같이 살펴볼 때 비로소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그러니까 우리가 광복을 했다가 아니라 광복을 해서 이제 앞으로 더 어떻게 뭘 해나갈지에 대한 부분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광복절에는 또 전국에 태극기 물결이 일 것 같은데, 요즘에는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담은 여러 태극기가 주목을 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화면 나오는 것처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하고 그 옆에 있는 일장기에 그린 진관사 태극기가 많이 보도되던데, 이 태극기들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까요?

▼박광일: 두 태극기 모두 굉장히 감동적인 태극기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미국인 데니 같은 경우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우리나라 외교 고문으로 왔던 미국인 인물입니다.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런데 그때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가 당시 청나라가 뜻밖에 조선에 대해서 속박론을 운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주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고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했었는데 데니는 그렇지 않다, 조선은 자주국이고 독립적인 나라이다라는 것들을 주장했던 그런 인물인데 그 데니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이 선물로 주어던 것이 바로 저 태극기입니다. 더불어서 태극기가 1882년, 83년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데니가 태극기를 받았던 그 시기가 거의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현존되는 또 우리가 박물관에 가지고 있는 태극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진관사 태극기는 최고에 국회의장의 배지를 통해서...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많이 알려졌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김용준: 귀퉁이가 이렇게 빠져나가 있어서 잘못된 거 아닌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 보이시는 저 태극기의 모양을 형상화한 배지였습니다.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 태극기가 처음 발견됐던 것은 진관사 안에서 칠성각이라고 하는 곳에 보따리로 발견이 됐었고 그 안에 독립과 관련된, 예를 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이라든지 자유신종보라든지 이런 어떤 문서들이 발견이 됐었는데, 사실은 이 문서들만 하더라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딱 펼쳤는데 그 보따리가 바로 태극기였고.

◎김용준: 태극기였군요.

▼박광일: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태극기의 음에 해당하는, 우리가 파란색으로 칠하는 부분은 좀 울퉁불퉁한 데 비해서 붉은색은 그 경계가 뚜렷했다는 거죠. 그래서 다시 한번 살펴봤더니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렸고 이게 절에서 발견되었다면 이 정도의 태극기를 천이 없거나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여기에 의도적으로 그렸을 거다. 즉, 일제강점기를 넘어서서 우리의 독립을 지향하는 가치를 여기에 담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연구를 통해서 1919년부터 20년 시기에 진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백초월 스님이 이 태극기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때 우리를 어떻게 보면 태극기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던 것들을 백초월 스님처럼 숨겨놓은 태극기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3.1 운동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으나 태극기를 가슴 한켠에 한 장씩은 가지고 있었을 것을 이 진관사 태극기를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김용준: 이렇게 태극기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를 저희가 소개해드렸는데 요즘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에 세계 각국에서 1위를 휩쓸면서 이 태극기에 관한 관심이 엄청나더라고요.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태극기 스티커, 태극기 펜, 키링, 조명에 태극기를 큰 반가사유상까지 이게 품절 대란이 있다고 해요. 그 정도로 요즘에는 K콘텐츠를 비롯해서 K가 어떤 브랜드화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태극기가 있을까 하는 부분도 궁금합니다.

▼박광일: 태극기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태극기는 사실은 1883년에 박영효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 오래된 태극기가 최근에 발견됐습니다. 물론 이제 태극기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으로써 나온 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에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의 메모에서 발견이 됐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 이미지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이걸 통해서 한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이제는 수직적인, 높고 낮음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외교를 펼치겠다라는 것들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고요. 이 뜻은 한편으로 이제 김구 선생님, 문화의 힘에 대한 얘기들을 같이 생각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얘기했는데, 여기에 그다음 붙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데요. 이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니까 우리만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하다라는 의미인데, 태극기가 지향하는 가치가 각각의 국기가 가지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김용준: 그렇습니다.

▼박광일: 그런데 태극기는 평화, 공존, 이런 것들과 더불어서 문화까지 덧붙여진다면 그 태극기를 단순하게 한국의 내셔널플래그, 국기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저건 하나의 문화 상품처럼, 그리고 평화의 어떤 상징처럼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또 우리의 어떤 의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용준: 그런데 이제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광복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가 있는데 잠깐 볼게요. 지금 국민 10명 중에 7명이 여전히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가 됐습니다. 오늘 주제도 그래서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로 잡아봤는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박광일: 아마 이제 시민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된 배경에는 일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 그다음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 이런 것들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들에 아마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의 예우라고 하는 부분들은 한편으로는 명예에 대한 부분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내가 조상으로 모셨다면 나에게도 그런 명예가 또 때에 따라서는 국가가 좀 이렇게 지원을 해줘야 될 텐데, 그런 부분들이 상당 부분 미흡했고 오히려 반대로 친일파의 자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찾아보니 여러 곳에서 부자로서 또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저명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광복이 된 거냐.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우리는 독립이 된 거냐는 반문을 하게 될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여전히 광복이 80주년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다, 부족하다라는 평가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김용준: 그래서 저희가 오늘 다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만 몇 가지 사안들을 촘촘히 짚어볼까 하는데, 그래도 그동안 일제강점기의 어떤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해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행된 청산 작업 중에서 잘된 점, 가장 잘된 점, 그리고 반대로 가장 미흡한 점, 이런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요? 하나씩만 찍어주실까요?

▼박광일: 가장 잘된 부분이라고 한다면 역시 한글, 한국어를 되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복 직후에 한글로 된 교과서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교육을 했고요. 그다음에 일본이 만들어놓은 옛 지명들을, 물론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만 그걸 우리 역사와 또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고 무엇보다도 지금 한국 사람들은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한국어를 쓰는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그런 모습이 됐는데, 이게 45년, 46년, 47년, 한 2~3년 사이에 금방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을 빼앗지 말라는 교훈도 될 것 같고 더불어서 일제 청산에 조금 가깝게 가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미흡하다면 아마 가장 큰 부분은 일본의 태도일 것 같습니다.

◎김용준: 일본의 태도.

▼박광일: 그래서 한일기본조약 이후로 일본에 대해서 우리가 징용 문제라든지 소위 이른바 성노예제 피해자라고 하는 위안부 문제라든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을 때 일시적으로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을 뿐 어떤 진실한,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후속 조치가 이루어진 배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거를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 역시 미흡하지 않았나, 그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일관되게 또 때에 대해서는 정부의 힘만으로 부족하면 사실은 시민, 국민의 힘이 거기를 뒷받침할 수 있거든요.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럼 이런 것들을 한데 모아서, 그리고 이거를 강압적으로 하기보다는 기술적이고 그것에 국제적인 어떤 원조를 통해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해서 그런 부분들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 부분이 아쉽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거기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또 때에 따라서는 분통을 터트리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말씀 들으면서 생각나는 부분이요,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해서 반일 감정이라는 부분하고 또 그런 것들이 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자주 충돌하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 동두천에서 일본 전통 거리를 테마로 한 드라마 세트장에서 일본 전통 여름 축제를 광복절 기간을 포함해서 개최한다고 해서 지금 나오는 것처럼 논란이 됐었는데, 이게 그런 얘기가 있어요.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역사 인식이 부족한 행위라는 지적만큼이나 또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도 있는데, 이런 인식, 가치 충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광일: 분명히 기성세대가 볼 때, 그리고 또 그게 8월 15일, 광복절이 끼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는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좀 고민해야 될 부분들은 우리가 이제 광복을 맞이해서 어떤 것에 조금 더 중점을 둬야 되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의 침략과 그다음에 식민지 지배 그다음에 비인도적인, 비인권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옳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또 멀리할 건가라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야 될 문제이기도 하죠.

◎김용준: 그렇습니다. 광복절 시즌만 되면 우리가 일본 물건을 산다든지 일본에 간다든지 일본에 무언가를 향유하는 것 자체가 저래도 돼? 이런 인식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 또 광복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외국인들이 공감을 했던 이유는 한국의 독립이 일본에 대해서 대항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본질적인 의미는 이것이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어떤 중요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지원을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독립과 또 때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열 선생의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 같은 인물, 그다음에 또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라고 하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금 현재 한국과 관련해서 많은 외교적인 문제, 특히 이제 징용 문제와 관련해서 연구를 할 때 현지 시민단체의 도움이 굉장히 큰 편입니다. 그럼 이런 분들을 테마로 해서 또 이런 분들을 초대해서 그 공간에서 광복절을 맞이했다면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의 어떤 축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더불어서 광복과 그다음에 일본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조금 더 입체화시키고 또 세분해서 나눠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살짝 남습니다.

◎김용준: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부분들이 아이디어가 도입이 됐다면 반대로 좀 긍정적인 화제가 됐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세대는 한일 문화 교류가 활발한 시기에 태어났고 또 시대를 즐기는 친구들인데, 강연을 좀 다니시다 보면 광복이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런 데 있어서 세대별 차이가 좀 많이 느껴지시나요?

▼박광일: 많이 느껴집니다. 일단 이전 세대 같은 경우는 일본에 대해서 감정이 복잡해요. 그러니까 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때 우리보다 잘 살았고, 그렇지만 또 우리를 침략했고, 이런 어떤 감정들과 그리고 또 이성적으로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젊은 세대는 일단 일본에 대해서 뭔가 자신들이 밑에 있거나 아니면 떨어진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동등하다고 생각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어떻게 보면 그냥 편하게 이웃 나라 중의 한 나라로 보고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 여행을 가거나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기성세대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편이긴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 젊은 세대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입니다.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의 어떤 활동과 그 역사를 굉장히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의 침략을 구분해서 보는 거, 이 세대에게는 조금은 익숙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오히려 기성세대가 그거를 혼재해서 보다 보니까 일본 또는 일본과 연결된 것들을 독립, 독립운동가와 바로 연결해서 보는, 때에 따라서는 분리해서 봤으면 좋겠다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을 오히려 비판적인 시선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향해야 될 가치는 부정적인 요소를 줄이는 것도 있지만 긍정적인 요소, 한국 청년들이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부분을 조금씩 얘기를 더 해 주고, 그리고 몰라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은 학교에서라든지 어떤 매체에서 이런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그리고 이제 한국의 독립운동이 지향했던 가치가 기본적으로 인권 지향적이고 평화 공존의 의미를 품고 있다면 이제 그 가치를 통해서 조금 더 세련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다음 테마로 넘어가 볼게요. 지금 광복절, 역사 문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독도 문제이긴 한데, 사실 이 문제를 스스로 꺼낸 것 자체가 굳이 분쟁 지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인가라는 고민도 들긴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 독도 수호라는 것의 어떤 가치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좋을까 싶은 고민도 듭니다.

▼박광일: 많이 알고 있으면 그 나라의 역사가 되고요. 많이 활용을 하면 그 나라의 영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독도라는 것들에 대해서 당연히 분쟁 지역이 아니고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그거는 그렇게 인식을 하면 될 것 같고요. 그래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독도가 가지고 있는 천연기념물로서의, 또는 우리 국토에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그냥 알아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다만 독도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 국토를 빼앗겼을 때 제일 먼저 빼앗긴 게 바로 독도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독도의 역사의 한 부분이 한편으로는 국권 수호 그다음에 우리의 자주 독립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이거는 어떤 나라에서나 꼭 필요한 지식이고 교육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풀어나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용준: 특집 사사건건, 저희가 준비한 영상을 잠시 보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1905년 미국 망명 후
'대동보국회' 결성한 문양목 지사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광복 5년 앞두고 서거

조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이뤄진
'해방된 조국에 묻어달라' 유언

<녹취> 키스 문/문양목 선생 손자
귀환에만 1세기 이상이 걸렸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평생을 바친 그를 기리려 왔습니다.
(It's a homecoming that has taken more than a century to honor someone who dedicated their entire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who sacrificed everything.)

하지만 여전히 고국 땅을 밟지 못한
독립 영웅들도…

분할 선은 약간 흐릿하게
순국 115년, 오늘도 이어지는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어디에 묻혔을지, 추정되는 곳은 있지만
이뤄지지 않는 발굴 작업

<녹취> 서청원/한중 친선협회 이사장(지난 2015년)
의사님의 유해를 본국으로 찾지 못해서 그게 후손으로서 가장 가슴 아픕니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의 뼈를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안중근 의사의 바람,
언제쯤 이뤄질까?

◎김용준: 영상 보셨고요. 한 분을 더 초대해 보겠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뒀다가 국권이 회복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 안중근 의사가 생전 남긴 유언인데, 이 유언과 달리 순국 115년이 지나도록 반장은커녕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입니다. 여전히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해를 20년째 찾고 있는 분입니다. 하얼빈이공대 김월배 교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김월배: 안녕하십니까?

◎김용준: 일단 교수님, 왜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가 힘든 건지, 이게 지금 누군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찾을 수 없게끔, 당시 일본이랄지 다른 어떤 조직에 촘촘하게 작전을 짜놓은 건지 궁금합니다.

▼김월배: 아까 말씀하셨던 안중근 의사 유언을 말씀하셨어요. 내가 죽거들랑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 달라. 거기에 바로 힌트가 있습니다. 바로 뭐냐 하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면 하얼빈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했던 일본이 그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 가와카미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일본 외무성이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두 동생이 유해를 요청하는데, 두 동생이 유해를 돌려주지 않습니다.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그 당시 감옥법의 75조에 의하면 반드시 돌려줘야 됐거든요. 그런 원죄를 일본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뤼순이라는 역사적 특성이 있습니다.

◎김용준: 뤼순이요.

▼김월배: 뤼순을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군사 지역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김용준: 접근하는 게.

▼김월배: 2009년도 돼서야 대외 개방을 했습니다. 그전에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유해 발굴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용준: 두 가지 큰 이유가 지금 있는 것 같은데, 박 작가님,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지금 역시 일본이 당시 안 의사의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게다가 또 안중근 의사는 안장 위치조차 지금 파악이 되지 않고 있고요. 일본이 이렇게 철저하게 안중근 의사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안중근 의사가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맞나요?

▼박광일: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부터 일본이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원래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의 얘기에 따르면 경성이나 아니면 일본에서 재판을 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닌 뤼순이라고 하는 특별한, 동청철도에서 일본이 차지했던 일정한 지역에서 재판을 했다는 것은, 관동도독부에서. 그런 것 자체가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이 컸다고 볼 수가 있고요. 그런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이제 하얼빈 공원에 묻히거나 또는 국내로 반장된다면 독립의 열기가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높아지고 또 성지가 될 수 있다고 봤던 부분, 그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당시 일본이 자신들이 정한 법이었거든요, 감옥법이라는 게. 그런데 거기에 따라서 유해를 가족들에게 인도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게 되면서 결국 광복 직후에 김구 선생이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윤봉길 의사의, 그다음에 이봉창 의사의 어떤 유해를 찾아왔습니다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결국 찾지 못하면서 그것이 그냥 시간이 쭉 흘러서 광복 80주년이 될 때까지 그 위치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됐습니다.

◎김용준: 지금 교수님께서는 특히나 여러 곳을 찾아다니시면서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아마 뤼순 감옥 동쪽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추정이 되시나요?

▼김월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의 과정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출발 자체가 김구 선생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효창원에서 가보면 가묘가 있지 않습니까?

◎김용준: 가묘가 있죠.

▼김월배: 그 자체가 김구 선생께서 우리나라에 돌아오시고 나서 유해 발굴하기 위해서 북한을 갑니다. 북한을 갔는데 그 당시 김일성 위원장입니다. 위원장에게 요청을 해요. 안중근 유해 발굴을 요청하자 김일성 위원장이 그 당시 여순이라는 지역은 소련이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으니 어렵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렵다고 하니까 바로 되돌아와서 현재 효창공원에 가묘를 만들어놓고 자기의 어떤 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그대로 계속 있다가 출발 자체는 북한이 바로 합니다. 1986년도에 북한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하러 5명의 법의학자를 비롯해서 옵니다. 그 당시 동생 안공근과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하고 같이 오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여순 감옥의 공동묘지입니다. 거기가 현재 동쪽 언덕이라고 하는 둥산포라는 지역을 현장을 보고 나서 되돌아갑니다. 북한이 먼저 시행을 했고요. 그리고 2006년도에 여순 감옥의 초대 감옥 소장이었던 구리하라의 딸이 있습니다. 이마이 후사코라는 사람이 제안을 보내준 그 사진에 근거해서, 즉 1911년에 천도제를 지낸 사진이 있거든요?

◎김용준: 아, 그래요?

▼김월배: 그 사진에 근거해서 유해 발굴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에 네 군데를 한 다음에 한 군데를 지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원보산이라는 지역이에요. 즉, 원보산은 바로 여순 감옥의 바로 뒤쪽 산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2008년 발굴했는데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과 중국 정부에서는 선 자료 후 발굴이다. 즉, 정확한 자료가 나와야 발굴하겠다고 하는 게 한국 정부의 기본이었고요. 그다음에 한국 정부가 유해 발굴을 하는 것을 본 여순 감옥의 직원이 제보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고려인 무덤이 있다 그래가지고 그해 여순 감옥 단독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이 한국과 중국과 북한도 같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한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둥산포라는 지역은 국부적으로 발굴했지만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면적이 어느 정도 되냐면, 우리나라 면적으로 얘기하면 한 660평 정도 돼요.

◎김용준: 660평이요.

▼김월배: 그 유골은 한 300구 정도 되는데요. 일부만, 1966년도 일부 한 10구 정도 파가지고, 그 71년도에 일부 유골로 가져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만큼만 한번 보자라고 하는 게 국민의 염원이기도 하고요. 또는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셨을 때 소노키 보고서라는 거 있거든요? 그 소노키 보고서에 의해서 보면 오후 1시 감옥소 묘지에 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보자고 하는 게 염원이고, 그래서 그게 2014년도입니다. 한국 국가보훈부하고 저를 포함해서 중국 외교부의 그 GPR 방식이라고 방식으로 해서 신청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중국 정부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냐면, 안중근 의사도 고향이 북한이니까 북한의 동의를 얻으면 발굴하겠다고 하는 게 현재까지의 그 둥산포에 대한 그런 염원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김용준: 혹시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궁금해요.

▼김월배: 단서라고 하면 어떤 사료적 접근이 있으면 좋은데...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그게 많이 없습니다. 다만 신문 기사라든지 그런 부분이 있는데요. 제가 오늘 자료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김용준: 뭐 좀 가지고 오셨네요.

▼김월배: 이건 뭐냐 하면, 엽서입니다. 엽서를 보면 일본인의 엽서고요. 옆에는 여순 감옥에 보내준 그 사람의 엽서고, 여기는 편지입니다. 이 사람이, 보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고카 하츠이치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1944년도에 여순 감옥에 실제 와서 근무했던 의사입니다. 이 사람은 시코쿠라는, 일본의 시코쿠현의 마쓰야마시 출신인데요. 여순 감옥의 마지막 소장이었던는 구리하라의 부인의 요청으로 왔는데, 이 사람이 의사이기 때문에 대부분 많이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해부를 해서 보겠다고 해가지고,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가서 일본 유해를 가졌다가 포르말린병에 넣고 그거를 자기 사무실에 놨던 게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광복이 이루어졌죠. 1999년도에 고카 하츠이치가 여순 감옥에 와서 참회록을 남깁니다. 참회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워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로 뭐냐 하면, 정확한 전달을 하를 위해서 제가 워딩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그 내용상에서 뭐냐 하면, 자기가 오게 된 배경, 참회록에 오게 된 배경과 그 포르말린병에 넣었던 그 공동묘지를 얘기하면서 뭐라고 했냐면, 메이지 42년.

◎김용준: 메이지 42년.

▼김월배: 1909년이에요. 10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암살한 한국의 영웅 안중근 씨도 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앞서 말한. 즉, 전술한, 묻었다고 그렇게 참회록을 남겼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얘기를 1944년도에 고카 하츠이치가 들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주소가 중요한 이유가 뭐냐...

◎김용준: 잠깐 들어서 이렇게 좀 보여주실까요, 시청자분들께요.

▼김월배: 바로 뭐냐, 이 후손, 이 유족의 후손을 찾는 일을 해야 됩니다. 마쓰야마시에 있는데, 이 사람은 현재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딸이 있습니다. 딸이 있고 이거 말고도 여순 감옥에 당시 근무했던 사람들의 주소 그리고 마지막 감옥소장 타고지로의 주소도 일본의 경우회라는 데 있는데요. 이 후손을 찾는 노력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김용준: 혹시 뭐 작가님께서 알고 계시는 또 다른 단서나 추정할 수 있을 만한 부분, 대목, 이런 것들이 좀 있을까요?

▼박광일: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도 뤼순 감옥을 몇 번 가봤는데, 당시 이제 사형장이 초기 사형장과 후기 사형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 사형장을 기준으로 보면 가장 가까운 쪽에 지금 얘기하셨던 둥산포 일대에 공동묘지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이제 거기 행사로 갔을 때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어떤 행사를 해야 되는데, 뤼순 감옥 안에는 지금 현재 일아감옥구지라고 해가지고 역사 유적으로 해서 거기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김용준: 할 수가 없어요.

▼박광일: 그 옆에 조그마한 표석이 있었던, 그러니까 여기 일아 감옥에 관련된 공동묘지 구지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 표석 앞에서 뭔가 이렇게 꽃이라도 올리면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할 수 있었던 그런 행사는 했었는데요. 그 외에 별다른 자료를 저 역시 이제 우리 국내에서는 많지 않아서,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당대 현장에 있었던 사람 또는 그 후손들의 기록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다.

◎김용준: 지금 어쨌든 교수님께서 이런저런 근거 자료를 찾아다니시고 또 현장에 가보시고 하시면서 벽에 부딪쳤던 적이 많으실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중국 혹은 일본이 협조를 적극적으로 해 줘야 될 텐데, 어디서부터 처음 난관에 부딪치시던가요?

▼김월배: 우선 근본적으로 안중근 의사, 중국에서는 유해 발굴을 협조하겠다는 그런 취지인데, 문제는 북한의 동의를 얻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바로 뭐냐 하면 남북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통일 문제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안중근 의사가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정치적 부침이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부침이나 외교적 부침 때문에 이렇게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반드시 정부의 행위가 있긴 하지만 민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민간들이 꾸준히 기존에 있었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후보지라고 하는 지역 또는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증하고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모여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침 저희가 2023년 9월 6일 날 한중 안중근 의사 찾기 민간 상설위원회가 설립이 됐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 특히 여순 감옥에 근무하는 사람들, 근무했던 사람들 그리고 베이징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상하이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실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참여했던 사람들, 전직 국가보훈처장님을 비롯한 분들이 현재 대련에서도 세미나를 했고요. 상하이에서도 세미나를 했었고 이런 현재 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민간의 투 트랙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나라의 예산의 특성상 정부가 일하기 어려운 구조가 뭐냐 하면 투입을 하면 금방 단기적으로 성과가 나야 되지 않습니까? 안중근 의사님의 유해 발굴도 어떤 R&D 기초과학처럼 꾸준한 지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어떤 마음 놓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행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용준: 지금 저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마는 광복 80주년, 이때의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저희가 되새겨 본다면 역사학자로서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은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광일: 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가 나중에 이토를 처단한 것들을 법정에서든 나중에 기록으로 남겨놓은 걸 보면 동양 평화를 해하는 자라는 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지향점은 이토의 처단은 하나의 수단일 뿐 동양 평화, 한·중·일이 서로 공동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거였고요. 그 과정에서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자들이 이토라고 볼 수 있고 더불어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하는 자신의 역할을 밝힘으로써 독립 전쟁의 하나의 장면이었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하나로서는 독립 전쟁, 그러니까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전쟁의 최종 목표는 그럼에도 평화다라는 것들을 인식을 할 때 안중근 의사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요. 그렇게 하고 그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유해. 어떤 봉헌을 할 수 있는 발굴 작업도 같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네. 지금 김 교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방송 출연 등등을 이유로 이렇게 귀국을 하셨는데 현장을 이렇게 많이 다니시면서 참 놓고 싶다 하는 순간이 없으셨는지도 궁금하고 현장을 찾으실 때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시는지도 궁금해요.

▼김월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게 어려웠으면 어려웠기 때문에 저한테 기회가 주어진 것이고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한국분들이 오시면 관동법원이라고 재판받으신 곳하고 투옥된 여순 감옥에만 가셨는데 최근에는 공동묘지를 찾으러 오셔서 둥산포 지역도 오시는 분들이 늘어났습니다. 즉 국민들의 관심이 많이 늘어나서 상당히 저는 호랑이 등에 단 것처럼 힘들지만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김용준: 아까 정부의 장기적인 이런 예산 지원 같은 것도 말씀하셨는데 정부 재원이나 혹은 실마리를 찾는 데 있어서 국민적인 도움 이런 부분이 좀 필요하다, 관심을 가져달라 하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월배: 우리나라 말고도 다른 나라들도 유해 발굴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도 했는데요. 미국 같은 경우에서도 2차 세계대전에 실제 죽은, 중국에서 죽은 사람을 실제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나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하면 국방부와 국방부끼리 협력을 해서 자료 찾기를 꾸준히 해 옵니다. 그리고 여순 감옥은 뭐냐 하면 우리가 단순한 박물관과 외교부만 나서는데 그러지 마시고 전체적인 정부 차원으로 국가본부에서 격상된 형태로 해서 정부가 역할을 하고 민간이 사료를 검증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용준: 광복 80주년 이번은 아니겠지만 광복 81주년, 82주년, 이 금년간에는 꼭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단서를 찾았다는 낭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월배 하얼빈 이공대 교수와 말씀 나눠봤고요. 여기까지 들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단 6명이지만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는 아직 멀어 보입니다.

34년 전 오늘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녹취> 고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로 내디딘 '첫걸음'

<녹취> 고 김학순
16살 조금 넘은 것을 끌고 가서 강제로 그 울고서 안 당하려고 뛰어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이놈이. 일본 놈이.

'피해자의 고통도, 아픔도 몰라준다'던
한 맺힌 외침

<녹취> 고 김학순
이렇게 당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요. 한국에서 이것을 몰라줘요. 일본에서는 더군다나 없대요. 모르니까….

1992.1.8 첫 수요시위
그리고 이어진 수많은 증언들

<녹취> 고 심미자 (1992, 일본 법정 증언)
성공동변소(위안소) 생활을 해야만 했던 심미자입니다.

<녹취> 고 김상희(1997, 유엔인권소위원회)
죗값을 왜 안 받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왜 사과를 안 합니까?

여전한 혐오와 역사 왜곡 속
어느덧 1713회

33년째 끝내지 못한 수요시위

<녹취> 고 김복동
언제나 이 일이 끝이 나서 웃음 웃고 살아날 때가 돌아올까요...

남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6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일본의 사죄'

잊지 말아야 할,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할 '우리들의 숙제'

◎김용준: 자, 영상 보셨고요. 이번에는 정부 산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수십 년 동안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해온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 모시고 말씀 이어갑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창록: 네. 안녕하십니까?

◎김용준: 일단 법률 전문가이신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가 뭔지 좀 들어볼게요.

▼김창록: 네. 일단 하나 바로 잡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는 정부 산하가 아니고 연구자들이 모여서 만든 연구회이기 때문에 그건 바로 잡겠습니다. 저는 전공이 법사학입니다. 법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인데요. 제가 91년부터 93년까지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죠. 그런데 일본에 있을 때는 이제 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요. 95년에 전임 강사가 되고 난 다음에 일본에서 법을 공부했으니까 법의 역사를 공부했으니까 한일 관계와 관련된 법의 역사에 대해서도 뭔가 기여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썼어요. 그 이후에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은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글도 쓰고 책도 쓰고 발표 토론 강연을 하면서 30년이 되어버렸네요.

◎김용준: 네.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이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라고 언급도 되어 있는데 8월 14일이 기림일로 지정된 이유가 뭔가요?

▼박광일: 네. 1991년에 기존에 많은 연구자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가 있을 거다라는 것들을 좀 어느 정도는 확인은 했지만 실제로 그거를 증언하고 나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님께서 내가 그 피해자다라는 그러니까 다른 전쟁의 피해자들도 많이 있으나 이 피해는 쉽게 여성의 어떤 처지에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그거를 처음으로 이제 밝히면서 이때부터 이제 한국의 그리고 중국에 그다음에 네덜란드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른바 위안부로 피해를 겪었던 분들의 증언이 이어지게 되고요. 그때부터 지금 교수님을 포함해서 연구 그다음에 또 UN 관리 차원에서의 어떤 조사 이런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8월 14일을 기념일로 지정을 하고 있습니다.

◎김용준: 지금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이 정말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고 김학순 할머니 첫 피해 증언 이후에 지금 34년째인데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 정부의 책임과 사과. 여기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답보 상태라고 보시는지요?

▼김창록: 일본 정부는 맨 처음에는 문제 자체를 부정했죠. 그러다가 92년에 증거 자료가 제시가 되니까 그때부터는 이제 사죄하고 반성한다라는 입장을 몇 차례 취했습니다. 특히 1993년에 고노담화라는 것이 발표가 됐는데요. 고노담화는 사실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한 문건이에요. 그것이 발표되었는데 이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고노담화 발표 이후에 65년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법적 책임은 끝났다라는 입장에서 국민기금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국민기금이 이제 한국인 피해자들에 의해서 거부가 되어서 실패를 했죠.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일본 사회 내에서 일종의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97년 무렵부터 역사 부정 세력 특히 그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부정하는 세력이 생겨났죠. 그리고 그 흐름이 점점 커지다가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 때부터 역사 부정이 일본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그와 같은 언변이 횡행했고요.

◎김용준: 거꾸로 가고 있네요.

▼김창록: 그래서 지금 현재로서는 일본군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제가 볼 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3년에 가장 진전된 입장을 일단 보이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퇴행을 해서 지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그와 같은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용준: 지금 그 국내외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고 일본 정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2015년부터 서울 종로구 소녀상 옆을 지키던 시민단체가 철수를 하자 이 자리를 우익 성향 단체가 차지했는데 관련 영상도 보고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10년 만에 빈 소녀상 옆자리
그곳을 차지한 우익단체

'위안부 피해는 사기극' 망언 주장

◎김용준: 앞서서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교수님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 자체가 아예 없다. 거짓이다. 이렇게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근거를 가지고 지금 주장을 하고 있는 건가요?

▼김창록: 근거가 매우 박약합니다. 이 사실관계나 책임 부분에 대해서는 1990년대 초부터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죠.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었고요. 그리고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각종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가 쌓여 왔고요. 그걸 부정하려고 하다 보니까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제가 볼 때는 설득력이 없어요. 그리고 무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주장을 밀어붙이면서 거의 정치 선동, 정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 우리 법원은 3차례나 승소 판결을 내렸는데 그런데 그것조차도 부정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일단 박 작가님 이런 걸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박광일: 저는 납득이 안 돼서 구체적으로 그분들의 생각이 뭔지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제 역사를 근현대사를 처음 공부할 때 그때 이제 여러 책에서 뭐라고 적고 있었냐면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필요할 경우는 사과도 하고 또 필요할 경우는 거기에 따른 후속 조처도 이어질 거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지금 교수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고 연구에 따라서 굉장히 많은 증언들도 지금 채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부정한다는 얘기는 사실은 이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역사가 일본에게 불편하면은 한국과 일본이 우호 관계를 맺어야 되는데 거기에 걸림돌이 된다라고 하는 굉장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반영이 된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은 이제 거기까지 나아간다면 그렇게 쌓은 우호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인권을 버리고 그다음에 어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에 그러니까 그 나라가 다른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는다면 그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그분들한테 되묻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있어서는 역사를 어느 정도 조금 공부했던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김용준: 교수님 왜 이렇게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사람이 이런 것을 부정하는 흐름까지 오게 됐다라고 생각을 하세요.

▼김창록: 그분들한테 물어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의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이 일본 정부가 지금 현재 외무성 홈페이지에 띄워놓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과 매우 흡사합니다.

◎김용준: 맞닿아 있나요?

▼김창록: 그래서 그 주장을 하는 분들이 왜 굳이 한국에서 소녀상 옆에서 일본 국기를 흔들면서 일본 정부가 하는 주장을 거의 판박이식으로 매주 수요 시위를 비난하면서 피해자들에게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면서 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김용준: 지금 위안부 피해 증언이 사기라고 주장하고 또 소녀상을 모욕하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혐오. 혐오의 원인은 어디서부터 오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광일: 네. 저도 그 혐오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고요. 사실은 조금만 시선을 넓혀보면 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른바 위안부라고 하는 존재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중국에 있었고 중국의 상해라든지 난징 가면 이와 관련된 기념관 또는 박물관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난징 같은 경우 리지샹 위안소 구지 같은 경우는 아예 그 당시 위안소로 쓰던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역사에서 아니다, 없었다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이것을 오히려 사실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문제는 이 사실을 주장하는 분들이 사회적으로 약한 존재이고 또 여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걸 편 가르기를 통해서 뭔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 그러면서 혐오 표현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역사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게 약자에 대한 혐오라고 본다 그러면 사실은 그분들은 지금도 역사에 죄를 짓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힘이 약했던 어린이, 여성 가운데 여성의 피해가 이런 어떤 하나의 입에 담을 수 없는 피해로 나타났는데 그 피해자들에게 다시 그와 비슷한 말로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는 기본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상식 그런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김용준: 교수님께서는 그런 진단도 하셨더라고요. 우리 정부가 그동안 명확한 메시지를 주지 못해서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모욕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명확한 메시지가 어떻게 좀 전달이 되고 스피커 업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록: 사실은 명확한 메시지가 나왔더랬습니다. 일본 측에서 일본 정부 측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다 끝났다라는 주장을 하는 가운데에서 피해자들이 그러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자라고 해서 한일 회담을 해서 전면 공개를 요청했고요. 노무현 정부 때 그게 전면 공개됐어요. 그게 이제 2005년입니다. 전면 공개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이 관여한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이 명쾌한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에 이제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그리고 특히 윤석열 정부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좀 혼란된 상황을 보였더랬어요. 그래서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때 제시가 된 거고요. 그 이후에 그것이 공식적으로 바뀐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가운데에서 그 입장에 따라서 정부가 움직여 가면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뭔가 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어떤 정부의 어떤 이런 뚜렷한 방침 또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것이 우리가 일본과의 어떤 교류에 있어서 해가 되고 저해가 되기 때문에 좀 조용히 해야 된다라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광일: 그런 교류면은 하지 말아야죠. 그러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굉장히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 역사 문제는 역사 문제로 풀어야 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나라와 나라 사이는 굉장히 다면적인 관계 속에서 이 문제를 풀고 나갈 때 그다음에 조금 더 건전한 오히려 다른 문제들을 조금 더 돈독하게 만들어 갈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일본이 여기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배상을 하게 된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변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조금 더 미래의 건설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범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약한 존재들이 피해를 입는데 그때 이런 문제들이 대외적으로 밝혀지고 이거는 CO가 없고 더 나아가서 반인륜적 범죄라는 것이 알려지게 됐을 때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어떤 효과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를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고 전쟁의 범죄의 문제이고 이렇게 접근해 본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그 정부는 어떤 면에서 볼 때는 그 본국의 시민들로 볼 때도 훨씬 더 신뢰가 깊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보여지고요. 한편으로 전쟁 시기에 어떤 일본의 정책들은 비이성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 정부는 이성적인 정부거든요. 그런데 이성적인 정부가 왜 비이성적인 시대의 정부를 옹호하려고 하는지 정당화하려고 하는지 저는 이것도 좀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어서 이 부분을 가지고 조금 생각을 해본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접근법 문제를 대하는 관점의 전환도 분명히 필요해 보입니다. 또 하나가 지난 2020년에 독일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이 됐는데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일단 다음 달까지는 존치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고 합니다. 자,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 독일 베를린의 소녀상인데요. 독일 베를린에 지금 소녀상이 처음 설치된 이후에 지금 해외에 현재까지 몇 개의 소녀상이 설치돼 있나요?

▼박광일: 네. 순서는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2024년 작년 기준으로 국외에 31개의 해외 소녀상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유럽 곳곳에 이제 소녀상이 세워졌는데요. 여기에 담은 메시지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대한 문제 전쟁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압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것들을 그러면 건설적으로 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소녀상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얘기를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적절하지 않고 그다음에 철거해야 된다라는 정치적 압력을 취한다면 향후에 이 부분은 오히려 일본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김용준: 지금 교수님 일본은 지금 베를린 말고도 독일 쾰른 카셀에 설치된 소녀상에 대해서도 대응하겠다고 예고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소녀상 철거를 하기 위한 압박을 내리고 있는 것들이 이 작은 소녀상의 철거에 집착하는 그런 이유들 이거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록: 그게 참 중요한데요. 지금 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만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회고록을 보게 되면 내가 한국 대사 독일 대사에게 명확하게 지시했다. 지금 와인이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가서 싸워라. 소녀상에 대해서라고 지시를 했다라고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런데 소녀상은 잘 아시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상징이고 그와 같은 피해가 다시 발생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의 상징이잖아요. 조그마한 동상입니다. 그런데 그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서 혹은 설치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의 총리 대신 그 다음에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시민단체. 총력전이에요. 거국적으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에요.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이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지워버리겠다 부정하겠다라고 하는 모습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공식적인 입장은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진다. 책임을 통감한다 사죄하고 반성한다라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것은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 일본 사회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검증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부분은 저로서는 매우 기이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듣다 보니까 말씀 듣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독일처럼 아까 작가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성하고 인정했을 때 사과를 하면 안 되는 일인가 싶은데 이게 일본 사회 내에서 일본 국민들에서부터도 아까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총력전을 펼치는 것처럼 비슷한 그런 흐름이 있는 건지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것인가 했을 때 일본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정말 그렇게 크게 많은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김창록: 일본 사회라고 해서 한 덩어리는 아닙니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 재판소에 4건이나 소송이 제기됐었거든요. 관련해서 그 소송은 일본 시민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리고 그 소송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고요. 그다음에 그 두 국가에서의 소송은 결국은 원고가 패소를 했습니다만 피해자들이 그런데 한국에서 마침내 소송이 제기되어서 2021년에 그리고 2023년에 그리고 최근에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판결은 일본 시민들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런 시민들이 있고요. 하지만 일본 사회 전반이 2012년 이후에 역사 부정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건 정치 일본의 정치 세력과 언론이 그쪽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시민들 간의 대화 국민들 간의 대화는 지속이 돼야 되고요. 그것을 통해서 일본 시민들과 우리가 함께 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미래 지향이라고 하죠. 그런데 미래 지향이 과거를 지우자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이 쓰여져요. 미래 지향. 지향이라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거 아닙니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간다 어떤 미래 그걸 물어야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그런 미래로 가자는 말이냐 그건 단호히 거부할 수밖에 없죠. 그런 미래는 지향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한일 양국 시민들이 그래서 그래서 인권을 확산시키는 그런 미래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김용준: 작가님께도 마지막으로 여쭤볼게요. 올해가 광복 8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일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한일 관계와 관련된 어떤 원칙을 재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을 우리가 재확인하고 또 어떻게 우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들어보겠습니다.

▼박광일: 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굉장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함께 가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역사 문제 부분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부터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거기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은 찾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이런 부분들을 정리해 나간다면 향후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조금 더 건전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본 정부만 또 한국 정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일본 시민사회와 한국 시민사회가 건전한 상식 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건가라고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조금 더 중요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게 이제 정부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지만 정치권이나 언론이 왜곡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서 여기에 대한 공감대를 먼저 만들고 이게 단순하게 일본과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기 위한 우리의 기본적인 소양의 문제다라는 것들을 인식하고 그리고 이제 일본에 대해서 어떻게 그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건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일본 안에서도 그걸 받아들일 시민사회가 있고 그들의 힘이 조금 더 커진다면 그걸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이 소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지금까지 박광일 역사작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와 말씀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창록: 수고하셨습니다.

◎김용준: 광복 80주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남겨진 이들, 그리고 미완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8월 14일 목요일 특집 사사건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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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사사건건] 광복 80주년에도 광복을 맞지 못한 사람들
    • 입력 2025-08-14 15:59:51
    • 수정2025-08-14 17:48:33
    사사건건
■ 방송시간 : 8월 14일(목) 16:00~17:00 KBS1
■ 진행 : 김용준 기자
■ 출연 : 박광일 / 역사작가 · 김월배 / 하얼빈이공대 교수 · 김창록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https://youtu.be/ZQgfBXB91iE

◎김용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8월 14일 목요일 특집 사사건건입니다. 사사건건은 광복 80주년을 꼭 하루 앞두고 특별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날이 광복절이죠. 하지만 여전히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또 이름 없이 사라진 영혼들 그리고 정신적인 광복과 자유를 꿈꾸는 이들인데요. 그런데 광복은 끝난 역사가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현재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집 사사건건,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 그들의 목소리를 출연자분들과 함께 전해봅니다. 우선 역사 현장을 누비면서 대중에게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해 주시는 선 넘는 한국사의 저자 박광일 역사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박광일: 안녕하세요?

◎김용준: 안녕하십니까? 일단 저희 일반 시청자나 대중분들도 의미가 남다르겠지만 역사학자로서의 광복 80주년, 어떤 의미를 갖나요?

▼박광일: 광복 80주년인데 올해가 간지 해로 치면 을사년이 됩니다. 1905년, 우리가 국권을 빼앗겼던 시기가 바로 을사늑약이니까...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것과 연결해서 볼 수도 있기도 하고요. 또 한편으로 다시 일본과 국교를 수립했던 1965년이 또 을사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사의 매듭을 묶였다가 다시 풀어내는 그런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올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더불어도 광복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왔던 우리의 전통 역사가 36년 동안 끊겼던 것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던 게 1945년에 시작이라면 그 하나의 의미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친일 잔재 청산하지 못했던 부분들, 안타까운 어떤 역사에 대한 부분들을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향점, 즉 민주공화정 체제의 국가 건설이라고 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광복 직후에, 1948년에 정부 수립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2개의 지향점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러니까 광복 80년은 새로운 시작의 두 가지, 하나는 단절된 것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시작을 살펴보는 이 두 가지를 같이 살펴볼 때 비로소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그러니까 우리가 광복을 했다가 아니라 광복을 해서 이제 앞으로 더 어떻게 뭘 해나갈지에 대한 부분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광복절에는 또 전국에 태극기 물결이 일 것 같은데, 요즘에는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담은 여러 태극기가 주목을 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화면 나오는 것처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하고 그 옆에 있는 일장기에 그린 진관사 태극기가 많이 보도되던데, 이 태극기들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까요?

▼박광일: 두 태극기 모두 굉장히 감동적인 태극기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미국인 데니 같은 경우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우리나라 외교 고문으로 왔던 미국인 인물입니다.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런데 그때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가 당시 청나라가 뜻밖에 조선에 대해서 속박론을 운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주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고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했었는데 데니는 그렇지 않다, 조선은 자주국이고 독립적인 나라이다라는 것들을 주장했던 그런 인물인데 그 데니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이 선물로 주어던 것이 바로 저 태극기입니다. 더불어서 태극기가 1882년, 83년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데니가 태극기를 받았던 그 시기가 거의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현존되는 또 우리가 박물관에 가지고 있는 태극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진관사 태극기는 최고에 국회의장의 배지를 통해서...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많이 알려졌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김용준: 귀퉁이가 이렇게 빠져나가 있어서 잘못된 거 아닌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 보이시는 저 태극기의 모양을 형상화한 배지였습니다.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 태극기가 처음 발견됐던 것은 진관사 안에서 칠성각이라고 하는 곳에 보따리로 발견이 됐었고 그 안에 독립과 관련된, 예를 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이라든지 자유신종보라든지 이런 어떤 문서들이 발견이 됐었는데, 사실은 이 문서들만 하더라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딱 펼쳤는데 그 보따리가 바로 태극기였고.

◎김용준: 태극기였군요.

▼박광일: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태극기의 음에 해당하는, 우리가 파란색으로 칠하는 부분은 좀 울퉁불퉁한 데 비해서 붉은색은 그 경계가 뚜렷했다는 거죠. 그래서 다시 한번 살펴봤더니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렸고 이게 절에서 발견되었다면 이 정도의 태극기를 천이 없거나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여기에 의도적으로 그렸을 거다. 즉, 일제강점기를 넘어서서 우리의 독립을 지향하는 가치를 여기에 담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연구를 통해서 1919년부터 20년 시기에 진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백초월 스님이 이 태극기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때 우리를 어떻게 보면 태극기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던 것들을 백초월 스님처럼 숨겨놓은 태극기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3.1 운동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으나 태극기를 가슴 한켠에 한 장씩은 가지고 있었을 것을 이 진관사 태극기를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김용준: 이렇게 태극기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를 저희가 소개해드렸는데 요즘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에 세계 각국에서 1위를 휩쓸면서 이 태극기에 관한 관심이 엄청나더라고요.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태극기 스티커, 태극기 펜, 키링, 조명에 태극기를 큰 반가사유상까지 이게 품절 대란이 있다고 해요. 그 정도로 요즘에는 K콘텐츠를 비롯해서 K가 어떤 브랜드화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태극기가 있을까 하는 부분도 궁금합니다.

▼박광일: 태극기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태극기는 사실은 1883년에 박영효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 오래된 태극기가 최근에 발견됐습니다. 물론 이제 태극기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으로써 나온 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에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의 메모에서 발견이 됐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 이미지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이걸 통해서 한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이제는 수직적인, 높고 낮음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외교를 펼치겠다라는 것들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고요. 이 뜻은 한편으로 이제 김구 선생님, 문화의 힘에 대한 얘기들을 같이 생각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얘기했는데, 여기에 그다음 붙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데요. 이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니까 우리만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하다라는 의미인데, 태극기가 지향하는 가치가 각각의 국기가 가지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김용준: 그렇습니다.

▼박광일: 그런데 태극기는 평화, 공존, 이런 것들과 더불어서 문화까지 덧붙여진다면 그 태극기를 단순하게 한국의 내셔널플래그, 국기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저건 하나의 문화 상품처럼, 그리고 평화의 어떤 상징처럼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또 우리의 어떤 의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용준: 그런데 이제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광복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가 있는데 잠깐 볼게요. 지금 국민 10명 중에 7명이 여전히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가 됐습니다. 오늘 주제도 그래서 아직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로 잡아봤는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박광일: 아마 이제 시민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된 배경에는 일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 그다음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 이런 것들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들에 아마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의 예우라고 하는 부분들은 한편으로는 명예에 대한 부분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내가 조상으로 모셨다면 나에게도 그런 명예가 또 때에 따라서는 국가가 좀 이렇게 지원을 해줘야 될 텐데, 그런 부분들이 상당 부분 미흡했고 오히려 반대로 친일파의 자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찾아보니 여러 곳에서 부자로서 또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저명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광복이 된 거냐.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우리는 독립이 된 거냐는 반문을 하게 될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여전히 광복이 80주년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다, 부족하다라는 평가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김용준: 그래서 저희가 오늘 다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만 몇 가지 사안들을 촘촘히 짚어볼까 하는데, 그래도 그동안 일제강점기의 어떤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해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행된 청산 작업 중에서 잘된 점, 가장 잘된 점, 그리고 반대로 가장 미흡한 점, 이런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요? 하나씩만 찍어주실까요?

▼박광일: 가장 잘된 부분이라고 한다면 역시 한글, 한국어를 되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복 직후에 한글로 된 교과서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교육을 했고요. 그다음에 일본이 만들어놓은 옛 지명들을, 물론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만 그걸 우리 역사와 또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고 무엇보다도 지금 한국 사람들은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한국어를 쓰는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그런 모습이 됐는데, 이게 45년, 46년, 47년, 한 2~3년 사이에 금방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을 빼앗지 말라는 교훈도 될 것 같고 더불어서 일제 청산에 조금 가깝게 가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미흡하다면 아마 가장 큰 부분은 일본의 태도일 것 같습니다.

◎김용준: 일본의 태도.

▼박광일: 그래서 한일기본조약 이후로 일본에 대해서 우리가 징용 문제라든지 소위 이른바 성노예제 피해자라고 하는 위안부 문제라든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을 때 일시적으로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을 뿐 어떤 진실한,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후속 조치가 이루어진 배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거를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 역시 미흡하지 않았나, 그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일관되게 또 때에 대해서는 정부의 힘만으로 부족하면 사실은 시민, 국민의 힘이 거기를 뒷받침할 수 있거든요.

◎김용준: 그렇죠.

▼박광일: 그럼 이런 것들을 한데 모아서, 그리고 이거를 강압적으로 하기보다는 기술적이고 그것에 국제적인 어떤 원조를 통해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해서 그런 부분들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 부분이 아쉽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거기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또 때에 따라서는 분통을 터트리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말씀 들으면서 생각나는 부분이요,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해서 반일 감정이라는 부분하고 또 그런 것들이 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자주 충돌하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 동두천에서 일본 전통 거리를 테마로 한 드라마 세트장에서 일본 전통 여름 축제를 광복절 기간을 포함해서 개최한다고 해서 지금 나오는 것처럼 논란이 됐었는데, 이게 그런 얘기가 있어요.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역사 인식이 부족한 행위라는 지적만큼이나 또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도 있는데, 이런 인식, 가치 충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광일: 분명히 기성세대가 볼 때, 그리고 또 그게 8월 15일, 광복절이 끼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는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좀 고민해야 될 부분들은 우리가 이제 광복을 맞이해서 어떤 것에 조금 더 중점을 둬야 되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의 침략과 그다음에 식민지 지배 그다음에 비인도적인, 비인권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옳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또 멀리할 건가라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야 될 문제이기도 하죠.

◎김용준: 그렇습니다. 광복절 시즌만 되면 우리가 일본 물건을 산다든지 일본에 간다든지 일본에 무언가를 향유하는 것 자체가 저래도 돼? 이런 인식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박광일: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 또 광복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외국인들이 공감을 했던 이유는 한국의 독립이 일본에 대해서 대항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본질적인 의미는 이것이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어떤 중요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지원을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독립과 또 때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열 선생의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 같은 인물, 그다음에 또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라고 하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금 현재 한국과 관련해서 많은 외교적인 문제, 특히 이제 징용 문제와 관련해서 연구를 할 때 현지 시민단체의 도움이 굉장히 큰 편입니다. 그럼 이런 분들을 테마로 해서 또 이런 분들을 초대해서 그 공간에서 광복절을 맞이했다면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의 어떤 축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더불어서 광복과 그다음에 일본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조금 더 입체화시키고 또 세분해서 나눠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살짝 남습니다.

◎김용준: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부분들이 아이디어가 도입이 됐다면 반대로 좀 긍정적인 화제가 됐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세대는 한일 문화 교류가 활발한 시기에 태어났고 또 시대를 즐기는 친구들인데, 강연을 좀 다니시다 보면 광복이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런 데 있어서 세대별 차이가 좀 많이 느껴지시나요?

▼박광일: 많이 느껴집니다. 일단 이전 세대 같은 경우는 일본에 대해서 감정이 복잡해요. 그러니까 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때 우리보다 잘 살았고, 그렇지만 또 우리를 침략했고, 이런 어떤 감정들과 그리고 또 이성적으로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젊은 세대는 일단 일본에 대해서 뭔가 자신들이 밑에 있거나 아니면 떨어진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동등하다고 생각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어떻게 보면 그냥 편하게 이웃 나라 중의 한 나라로 보고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 여행을 가거나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기성세대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편이긴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 젊은 세대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입니다.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의 어떤 활동과 그 역사를 굉장히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의 침략을 구분해서 보는 거, 이 세대에게는 조금은 익숙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오히려 기성세대가 그거를 혼재해서 보다 보니까 일본 또는 일본과 연결된 것들을 독립, 독립운동가와 바로 연결해서 보는, 때에 따라서는 분리해서 봤으면 좋겠다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을 오히려 비판적인 시선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향해야 될 가치는 부정적인 요소를 줄이는 것도 있지만 긍정적인 요소, 한국 청년들이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부분을 조금씩 얘기를 더 해 주고, 그리고 몰라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은 학교에서라든지 어떤 매체에서 이런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그리고 이제 한국의 독립운동이 지향했던 가치가 기본적으로 인권 지향적이고 평화 공존의 의미를 품고 있다면 이제 그 가치를 통해서 조금 더 세련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다음 테마로 넘어가 볼게요. 지금 광복절, 역사 문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독도 문제이긴 한데, 사실 이 문제를 스스로 꺼낸 것 자체가 굳이 분쟁 지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인가라는 고민도 들긴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 독도 수호라는 것의 어떤 가치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좋을까 싶은 고민도 듭니다.

▼박광일: 많이 알고 있으면 그 나라의 역사가 되고요. 많이 활용을 하면 그 나라의 영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독도라는 것들에 대해서 당연히 분쟁 지역이 아니고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그거는 그렇게 인식을 하면 될 것 같고요. 그래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독도가 가지고 있는 천연기념물로서의, 또는 우리 국토에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그냥 알아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다만 독도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 국토를 빼앗겼을 때 제일 먼저 빼앗긴 게 바로 독도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독도의 역사의 한 부분이 한편으로는 국권 수호 그다음에 우리의 자주 독립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이거는 어떤 나라에서나 꼭 필요한 지식이고 교육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풀어나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용준: 특집 사사건건, 저희가 준비한 영상을 잠시 보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1905년 미국 망명 후
'대동보국회' 결성한 문양목 지사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광복 5년 앞두고 서거

조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이뤄진
'해방된 조국에 묻어달라' 유언

<녹취> 키스 문/문양목 선생 손자
귀환에만 1세기 이상이 걸렸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평생을 바친 그를 기리려 왔습니다.
(It's a homecoming that has taken more than a century to honor someone who dedicated their entire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who sacrificed everything.)

하지만 여전히 고국 땅을 밟지 못한
독립 영웅들도…

분할 선은 약간 흐릿하게
순국 115년, 오늘도 이어지는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어디에 묻혔을지, 추정되는 곳은 있지만
이뤄지지 않는 발굴 작업

<녹취> 서청원/한중 친선협회 이사장(지난 2015년)
의사님의 유해를 본국으로 찾지 못해서 그게 후손으로서 가장 가슴 아픕니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의 뼈를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안중근 의사의 바람,
언제쯤 이뤄질까?

◎김용준: 영상 보셨고요. 한 분을 더 초대해 보겠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뒀다가 국권이 회복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 안중근 의사가 생전 남긴 유언인데, 이 유언과 달리 순국 115년이 지나도록 반장은커녕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입니다. 여전히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해를 20년째 찾고 있는 분입니다. 하얼빈이공대 김월배 교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김월배: 안녕하십니까?

◎김용준: 일단 교수님, 왜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가 힘든 건지, 이게 지금 누군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찾을 수 없게끔, 당시 일본이랄지 다른 어떤 조직에 촘촘하게 작전을 짜놓은 건지 궁금합니다.

▼김월배: 아까 말씀하셨던 안중근 의사 유언을 말씀하셨어요. 내가 죽거들랑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 달라. 거기에 바로 힌트가 있습니다. 바로 뭐냐 하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면 하얼빈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했던 일본이 그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 가와카미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일본 외무성이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두 동생이 유해를 요청하는데, 두 동생이 유해를 돌려주지 않습니다.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그 당시 감옥법의 75조에 의하면 반드시 돌려줘야 됐거든요. 그런 원죄를 일본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뤼순이라는 역사적 특성이 있습니다.

◎김용준: 뤼순이요.

▼김월배: 뤼순을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군사 지역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김용준: 접근하는 게.

▼김월배: 2009년도 돼서야 대외 개방을 했습니다. 그전에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유해 발굴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용준: 두 가지 큰 이유가 지금 있는 것 같은데, 박 작가님,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지금 역시 일본이 당시 안 의사의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 게다가 또 안중근 의사는 안장 위치조차 지금 파악이 되지 않고 있고요. 일본이 이렇게 철저하게 안중근 의사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안중근 의사가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맞나요?

▼박광일: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부터 일본이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원래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의 얘기에 따르면 경성이나 아니면 일본에서 재판을 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닌 뤼순이라고 하는 특별한, 동청철도에서 일본이 차지했던 일정한 지역에서 재판을 했다는 것은, 관동도독부에서. 그런 것 자체가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이 컸다고 볼 수가 있고요. 그런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이제 하얼빈 공원에 묻히거나 또는 국내로 반장된다면 독립의 열기가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높아지고 또 성지가 될 수 있다고 봤던 부분, 그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당시 일본이 자신들이 정한 법이었거든요, 감옥법이라는 게. 그런데 거기에 따라서 유해를 가족들에게 인도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게 되면서 결국 광복 직후에 김구 선생이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윤봉길 의사의, 그다음에 이봉창 의사의 어떤 유해를 찾아왔습니다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결국 찾지 못하면서 그것이 그냥 시간이 쭉 흘러서 광복 80주년이 될 때까지 그 위치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됐습니다.

◎김용준: 지금 교수님께서는 특히나 여러 곳을 찾아다니시면서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아마 뤼순 감옥 동쪽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추정이 되시나요?

▼김월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의 과정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출발 자체가 김구 선생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효창원에서 가보면 가묘가 있지 않습니까?

◎김용준: 가묘가 있죠.

▼김월배: 그 자체가 김구 선생께서 우리나라에 돌아오시고 나서 유해 발굴하기 위해서 북한을 갑니다. 북한을 갔는데 그 당시 김일성 위원장입니다. 위원장에게 요청을 해요. 안중근 유해 발굴을 요청하자 김일성 위원장이 그 당시 여순이라는 지역은 소련이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으니 어렵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렵다고 하니까 바로 되돌아와서 현재 효창공원에 가묘를 만들어놓고 자기의 어떤 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그대로 계속 있다가 출발 자체는 북한이 바로 합니다. 1986년도에 북한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하러 5명의 법의학자를 비롯해서 옵니다. 그 당시 동생 안공근과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하고 같이 오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여순 감옥의 공동묘지입니다. 거기가 현재 동쪽 언덕이라고 하는 둥산포라는 지역을 현장을 보고 나서 되돌아갑니다. 북한이 먼저 시행을 했고요. 그리고 2006년도에 여순 감옥의 초대 감옥 소장이었던 구리하라의 딸이 있습니다. 이마이 후사코라는 사람이 제안을 보내준 그 사진에 근거해서, 즉 1911년에 천도제를 지낸 사진이 있거든요?

◎김용준: 아, 그래요?

▼김월배: 그 사진에 근거해서 유해 발굴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에 네 군데를 한 다음에 한 군데를 지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원보산이라는 지역이에요. 즉, 원보산은 바로 여순 감옥의 바로 뒤쪽 산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2008년 발굴했는데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과 중국 정부에서는 선 자료 후 발굴이다. 즉, 정확한 자료가 나와야 발굴하겠다고 하는 게 한국 정부의 기본이었고요. 그다음에 한국 정부가 유해 발굴을 하는 것을 본 여순 감옥의 직원이 제보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고려인 무덤이 있다 그래가지고 그해 여순 감옥 단독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이 한국과 중국과 북한도 같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한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둥산포라는 지역은 국부적으로 발굴했지만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면적이 어느 정도 되냐면, 우리나라 면적으로 얘기하면 한 660평 정도 돼요.

◎김용준: 660평이요.

▼김월배: 그 유골은 한 300구 정도 되는데요. 일부만, 1966년도 일부 한 10구 정도 파가지고, 그 71년도에 일부 유골로 가져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만큼만 한번 보자라고 하는 게 국민의 염원이기도 하고요. 또는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셨을 때 소노키 보고서라는 거 있거든요? 그 소노키 보고서에 의해서 보면 오후 1시 감옥소 묘지에 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보자고 하는 게 염원이고, 그래서 그게 2014년도입니다. 한국 국가보훈부하고 저를 포함해서 중국 외교부의 그 GPR 방식이라고 방식으로 해서 신청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중국 정부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냐면, 안중근 의사도 고향이 북한이니까 북한의 동의를 얻으면 발굴하겠다고 하는 게 현재까지의 그 둥산포에 대한 그런 염원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김용준: 혹시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궁금해요.

▼김월배: 단서라고 하면 어떤 사료적 접근이 있으면 좋은데...

◎김용준: 그렇죠.

▼김월배: 그게 많이 없습니다. 다만 신문 기사라든지 그런 부분이 있는데요. 제가 오늘 자료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김용준: 뭐 좀 가지고 오셨네요.

▼김월배: 이건 뭐냐 하면, 엽서입니다. 엽서를 보면 일본인의 엽서고요. 옆에는 여순 감옥에 보내준 그 사람의 엽서고, 여기는 편지입니다. 이 사람이, 보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고카 하츠이치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1944년도에 여순 감옥에 실제 와서 근무했던 의사입니다. 이 사람은 시코쿠라는, 일본의 시코쿠현의 마쓰야마시 출신인데요. 여순 감옥의 마지막 소장이었던는 구리하라의 부인의 요청으로 왔는데, 이 사람이 의사이기 때문에 대부분 많이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해부를 해서 보겠다고 해가지고,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가서 일본 유해를 가졌다가 포르말린병에 넣고 그거를 자기 사무실에 놨던 게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광복이 이루어졌죠. 1999년도에 고카 하츠이치가 여순 감옥에 와서 참회록을 남깁니다. 참회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워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로 뭐냐 하면, 정확한 전달을 하를 위해서 제가 워딩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그 내용상에서 뭐냐 하면, 자기가 오게 된 배경, 참회록에 오게 된 배경과 그 포르말린병에 넣었던 그 공동묘지를 얘기하면서 뭐라고 했냐면, 메이지 42년.

◎김용준: 메이지 42년.

▼김월배: 1909년이에요. 10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암살한 한국의 영웅 안중근 씨도 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앞서 말한. 즉, 전술한, 묻었다고 그렇게 참회록을 남겼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얘기를 1944년도에 고카 하츠이치가 들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주소가 중요한 이유가 뭐냐...

◎김용준: 잠깐 들어서 이렇게 좀 보여주실까요, 시청자분들께요.

▼김월배: 바로 뭐냐, 이 후손, 이 유족의 후손을 찾는 일을 해야 됩니다. 마쓰야마시에 있는데, 이 사람은 현재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딸이 있습니다. 딸이 있고 이거 말고도 여순 감옥에 당시 근무했던 사람들의 주소 그리고 마지막 감옥소장 타고지로의 주소도 일본의 경우회라는 데 있는데요. 이 후손을 찾는 노력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김용준: 혹시 뭐 작가님께서 알고 계시는 또 다른 단서나 추정할 수 있을 만한 부분, 대목, 이런 것들이 좀 있을까요?

▼박광일: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도 뤼순 감옥을 몇 번 가봤는데, 당시 이제 사형장이 초기 사형장과 후기 사형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 사형장을 기준으로 보면 가장 가까운 쪽에 지금 얘기하셨던 둥산포 일대에 공동묘지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이제 거기 행사로 갔을 때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어떤 행사를 해야 되는데, 뤼순 감옥 안에는 지금 현재 일아감옥구지라고 해가지고 역사 유적으로 해서 거기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김용준: 할 수가 없어요.

▼박광일: 그 옆에 조그마한 표석이 있었던, 그러니까 여기 일아 감옥에 관련된 공동묘지 구지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 표석 앞에서 뭔가 이렇게 꽃이라도 올리면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할 수 있었던 그런 행사는 했었는데요. 그 외에 별다른 자료를 저 역시 이제 우리 국내에서는 많지 않아서,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당대 현장에 있었던 사람 또는 그 후손들의 기록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다.

◎김용준: 지금 어쨌든 교수님께서 이런저런 근거 자료를 찾아다니시고 또 현장에 가보시고 하시면서 벽에 부딪쳤던 적이 많으실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중국 혹은 일본이 협조를 적극적으로 해 줘야 될 텐데, 어디서부터 처음 난관에 부딪치시던가요?

▼김월배: 우선 근본적으로 안중근 의사, 중국에서는 유해 발굴을 협조하겠다는 그런 취지인데, 문제는 북한의 동의를 얻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바로 뭐냐 하면 남북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통일 문제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안중근 의사가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정치적 부침이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부침이나 외교적 부침 때문에 이렇게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반드시 정부의 행위가 있긴 하지만 민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민간들이 꾸준히 기존에 있었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후보지라고 하는 지역 또는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증하고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모여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침 저희가 2023년 9월 6일 날 한중 안중근 의사 찾기 민간 상설위원회가 설립이 됐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 특히 여순 감옥에 근무하는 사람들, 근무했던 사람들 그리고 베이징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상하이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실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참여했던 사람들, 전직 국가보훈처장님을 비롯한 분들이 현재 대련에서도 세미나를 했고요. 상하이에서도 세미나를 했었고 이런 현재 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민간의 투 트랙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나라의 예산의 특성상 정부가 일하기 어려운 구조가 뭐냐 하면 투입을 하면 금방 단기적으로 성과가 나야 되지 않습니까? 안중근 의사님의 유해 발굴도 어떤 R&D 기초과학처럼 꾸준한 지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어떤 마음 놓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행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용준: 지금 저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마는 광복 80주년, 이때의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저희가 되새겨 본다면 역사학자로서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은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광일: 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가 나중에 이토를 처단한 것들을 법정에서든 나중에 기록으로 남겨놓은 걸 보면 동양 평화를 해하는 자라는 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지향점은 이토의 처단은 하나의 수단일 뿐 동양 평화, 한·중·일이 서로 공동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거였고요. 그 과정에서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자들이 이토라고 볼 수 있고 더불어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하는 자신의 역할을 밝힘으로써 독립 전쟁의 하나의 장면이었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하나로서는 독립 전쟁, 그러니까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전쟁의 최종 목표는 그럼에도 평화다라는 것들을 인식을 할 때 안중근 의사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요. 그렇게 하고 그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유해. 어떤 봉헌을 할 수 있는 발굴 작업도 같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네. 지금 김 교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방송 출연 등등을 이유로 이렇게 귀국을 하셨는데 현장을 이렇게 많이 다니시면서 참 놓고 싶다 하는 순간이 없으셨는지도 궁금하고 현장을 찾으실 때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시는지도 궁금해요.

▼김월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게 어려웠으면 어려웠기 때문에 저한테 기회가 주어진 것이고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한국분들이 오시면 관동법원이라고 재판받으신 곳하고 투옥된 여순 감옥에만 가셨는데 최근에는 공동묘지를 찾으러 오셔서 둥산포 지역도 오시는 분들이 늘어났습니다. 즉 국민들의 관심이 많이 늘어나서 상당히 저는 호랑이 등에 단 것처럼 힘들지만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김용준: 아까 정부의 장기적인 이런 예산 지원 같은 것도 말씀하셨는데 정부 재원이나 혹은 실마리를 찾는 데 있어서 국민적인 도움 이런 부분이 좀 필요하다, 관심을 가져달라 하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월배: 우리나라 말고도 다른 나라들도 유해 발굴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도 했는데요. 미국 같은 경우에서도 2차 세계대전에 실제 죽은, 중국에서 죽은 사람을 실제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나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하면 국방부와 국방부끼리 협력을 해서 자료 찾기를 꾸준히 해 옵니다. 그리고 여순 감옥은 뭐냐 하면 우리가 단순한 박물관과 외교부만 나서는데 그러지 마시고 전체적인 정부 차원으로 국가본부에서 격상된 형태로 해서 정부가 역할을 하고 민간이 사료를 검증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용준: 광복 80주년 이번은 아니겠지만 광복 81주년, 82주년, 이 금년간에는 꼭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단서를 찾았다는 낭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월배 하얼빈 이공대 교수와 말씀 나눠봤고요. 여기까지 들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단 6명이지만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는 아직 멀어 보입니다.

34년 전 오늘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녹취> 고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로 내디딘 '첫걸음'

<녹취> 고 김학순
16살 조금 넘은 것을 끌고 가서 강제로 그 울고서 안 당하려고 뛰어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이놈이. 일본 놈이.

'피해자의 고통도, 아픔도 몰라준다'던
한 맺힌 외침

<녹취> 고 김학순
이렇게 당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요. 한국에서 이것을 몰라줘요. 일본에서는 더군다나 없대요. 모르니까….

1992.1.8 첫 수요시위
그리고 이어진 수많은 증언들

<녹취> 고 심미자 (1992, 일본 법정 증언)
성공동변소(위안소) 생활을 해야만 했던 심미자입니다.

<녹취> 고 김상희(1997, 유엔인권소위원회)
죗값을 왜 안 받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왜 사과를 안 합니까?

여전한 혐오와 역사 왜곡 속
어느덧 1713회

33년째 끝내지 못한 수요시위

<녹취> 고 김복동
언제나 이 일이 끝이 나서 웃음 웃고 살아날 때가 돌아올까요...

남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6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일본의 사죄'

잊지 말아야 할,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할 '우리들의 숙제'

◎김용준: 자, 영상 보셨고요. 이번에는 정부 산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수십 년 동안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해온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 모시고 말씀 이어갑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창록: 네. 안녕하십니까?

◎김용준: 일단 법률 전문가이신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가 뭔지 좀 들어볼게요.

▼김창록: 네. 일단 하나 바로 잡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는 정부 산하가 아니고 연구자들이 모여서 만든 연구회이기 때문에 그건 바로 잡겠습니다. 저는 전공이 법사학입니다. 법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인데요. 제가 91년부터 93년까지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죠. 그런데 일본에 있을 때는 이제 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요. 95년에 전임 강사가 되고 난 다음에 일본에서 법을 공부했으니까 법의 역사를 공부했으니까 한일 관계와 관련된 법의 역사에 대해서도 뭔가 기여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썼어요. 그 이후에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은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글도 쓰고 책도 쓰고 발표 토론 강연을 하면서 30년이 되어버렸네요.

◎김용준: 네.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이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라고 언급도 되어 있는데 8월 14일이 기림일로 지정된 이유가 뭔가요?

▼박광일: 네. 1991년에 기존에 많은 연구자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가 있을 거다라는 것들을 좀 어느 정도는 확인은 했지만 실제로 그거를 증언하고 나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님께서 내가 그 피해자다라는 그러니까 다른 전쟁의 피해자들도 많이 있으나 이 피해는 쉽게 여성의 어떤 처지에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그거를 처음으로 이제 밝히면서 이때부터 이제 한국의 그리고 중국에 그다음에 네덜란드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른바 위안부로 피해를 겪었던 분들의 증언이 이어지게 되고요. 그때부터 지금 교수님을 포함해서 연구 그다음에 또 UN 관리 차원에서의 어떤 조사 이런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8월 14일을 기념일로 지정을 하고 있습니다.

◎김용준: 지금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이 정말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고 김학순 할머니 첫 피해 증언 이후에 지금 34년째인데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 정부의 책임과 사과. 여기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답보 상태라고 보시는지요?

▼김창록: 일본 정부는 맨 처음에는 문제 자체를 부정했죠. 그러다가 92년에 증거 자료가 제시가 되니까 그때부터는 이제 사죄하고 반성한다라는 입장을 몇 차례 취했습니다. 특히 1993년에 고노담화라는 것이 발표가 됐는데요. 고노담화는 사실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한 문건이에요. 그것이 발표되었는데 이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고노담화 발표 이후에 65년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법적 책임은 끝났다라는 입장에서 국민기금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국민기금이 이제 한국인 피해자들에 의해서 거부가 되어서 실패를 했죠.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일본 사회 내에서 일종의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97년 무렵부터 역사 부정 세력 특히 그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부정하는 세력이 생겨났죠. 그리고 그 흐름이 점점 커지다가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 때부터 역사 부정이 일본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그와 같은 언변이 횡행했고요.

◎김용준: 거꾸로 가고 있네요.

▼김창록: 그래서 지금 현재로서는 일본군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제가 볼 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3년에 가장 진전된 입장을 일단 보이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퇴행을 해서 지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그와 같은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용준: 지금 그 국내외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고 일본 정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2015년부터 서울 종로구 소녀상 옆을 지키던 시민단체가 철수를 하자 이 자리를 우익 성향 단체가 차지했는데 관련 영상도 보고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10년 만에 빈 소녀상 옆자리
그곳을 차지한 우익단체

'위안부 피해는 사기극' 망언 주장

◎김용준: 앞서서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교수님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 자체가 아예 없다. 거짓이다. 이렇게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근거를 가지고 지금 주장을 하고 있는 건가요?

▼김창록: 근거가 매우 박약합니다. 이 사실관계나 책임 부분에 대해서는 1990년대 초부터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죠.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었고요. 그리고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각종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가 쌓여 왔고요. 그걸 부정하려고 하다 보니까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제가 볼 때는 설득력이 없어요. 그리고 무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주장을 밀어붙이면서 거의 정치 선동, 정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 우리 법원은 3차례나 승소 판결을 내렸는데 그런데 그것조차도 부정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일단 박 작가님 이런 걸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박광일: 저는 납득이 안 돼서 구체적으로 그분들의 생각이 뭔지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제 역사를 근현대사를 처음 공부할 때 그때 이제 여러 책에서 뭐라고 적고 있었냐면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필요할 경우는 사과도 하고 또 필요할 경우는 거기에 따른 후속 조처도 이어질 거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지금 교수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고 연구에 따라서 굉장히 많은 증언들도 지금 채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부정한다는 얘기는 사실은 이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역사가 일본에게 불편하면은 한국과 일본이 우호 관계를 맺어야 되는데 거기에 걸림돌이 된다라고 하는 굉장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반영이 된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은 이제 거기까지 나아간다면 그렇게 쌓은 우호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인권을 버리고 그다음에 어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에 그러니까 그 나라가 다른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는다면 그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그분들한테 되묻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있어서는 역사를 어느 정도 조금 공부했던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김용준: 교수님 왜 이렇게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사람이 이런 것을 부정하는 흐름까지 오게 됐다라고 생각을 하세요.

▼김창록: 그분들한테 물어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의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이 일본 정부가 지금 현재 외무성 홈페이지에 띄워놓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과 매우 흡사합니다.

◎김용준: 맞닿아 있나요?

▼김창록: 그래서 그 주장을 하는 분들이 왜 굳이 한국에서 소녀상 옆에서 일본 국기를 흔들면서 일본 정부가 하는 주장을 거의 판박이식으로 매주 수요 시위를 비난하면서 피해자들에게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면서 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김용준: 지금 위안부 피해 증언이 사기라고 주장하고 또 소녀상을 모욕하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혐오. 혐오의 원인은 어디서부터 오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광일: 네. 저도 그 혐오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고요. 사실은 조금만 시선을 넓혀보면 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른바 위안부라고 하는 존재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중국에 있었고 중국의 상해라든지 난징 가면 이와 관련된 기념관 또는 박물관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난징 같은 경우 리지샹 위안소 구지 같은 경우는 아예 그 당시 위안소로 쓰던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역사에서 아니다, 없었다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이것을 오히려 사실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문제는 이 사실을 주장하는 분들이 사회적으로 약한 존재이고 또 여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걸 편 가르기를 통해서 뭔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 그러면서 혐오 표현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역사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게 약자에 대한 혐오라고 본다 그러면 사실은 그분들은 지금도 역사에 죄를 짓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힘이 약했던 어린이, 여성 가운데 여성의 피해가 이런 어떤 하나의 입에 담을 수 없는 피해로 나타났는데 그 피해자들에게 다시 그와 비슷한 말로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는 기본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상식 그런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김용준: 교수님께서는 그런 진단도 하셨더라고요. 우리 정부가 그동안 명확한 메시지를 주지 못해서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모욕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명확한 메시지가 어떻게 좀 전달이 되고 스피커 업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록: 사실은 명확한 메시지가 나왔더랬습니다. 일본 측에서 일본 정부 측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다 끝났다라는 주장을 하는 가운데에서 피해자들이 그러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자라고 해서 한일 회담을 해서 전면 공개를 요청했고요. 노무현 정부 때 그게 전면 공개됐어요. 그게 이제 2005년입니다. 전면 공개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이 관여한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이 명쾌한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에 이제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그리고 특히 윤석열 정부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좀 혼란된 상황을 보였더랬어요. 그래서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때 제시가 된 거고요. 그 이후에 그것이 공식적으로 바뀐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가운데에서 그 입장에 따라서 정부가 움직여 가면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뭔가 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어떤 정부의 어떤 이런 뚜렷한 방침 또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것이 우리가 일본과의 어떤 교류에 있어서 해가 되고 저해가 되기 때문에 좀 조용히 해야 된다라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광일: 그런 교류면은 하지 말아야죠. 그러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굉장히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 역사 문제는 역사 문제로 풀어야 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나라와 나라 사이는 굉장히 다면적인 관계 속에서 이 문제를 풀고 나갈 때 그다음에 조금 더 건전한 오히려 다른 문제들을 조금 더 돈독하게 만들어 갈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일본이 여기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배상을 하게 된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변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조금 더 미래의 건설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범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약한 존재들이 피해를 입는데 그때 이런 문제들이 대외적으로 밝혀지고 이거는 CO가 없고 더 나아가서 반인륜적 범죄라는 것이 알려지게 됐을 때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어떤 효과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를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고 전쟁의 범죄의 문제이고 이렇게 접근해 본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그 정부는 어떤 면에서 볼 때는 그 본국의 시민들로 볼 때도 훨씬 더 신뢰가 깊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보여지고요. 한편으로 전쟁 시기에 어떤 일본의 정책들은 비이성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 정부는 이성적인 정부거든요. 그런데 이성적인 정부가 왜 비이성적인 시대의 정부를 옹호하려고 하는지 정당화하려고 하는지 저는 이것도 좀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어서 이 부분을 가지고 조금 생각을 해본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접근법 문제를 대하는 관점의 전환도 분명히 필요해 보입니다. 또 하나가 지난 2020년에 독일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이 됐는데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일단 다음 달까지는 존치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고 합니다. 자,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 독일 베를린의 소녀상인데요. 독일 베를린에 지금 소녀상이 처음 설치된 이후에 지금 해외에 현재까지 몇 개의 소녀상이 설치돼 있나요?

▼박광일: 네. 순서는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2024년 작년 기준으로 국외에 31개의 해외 소녀상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유럽 곳곳에 이제 소녀상이 세워졌는데요. 여기에 담은 메시지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대한 문제 전쟁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압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것들을 그러면 건설적으로 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소녀상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얘기를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적절하지 않고 그다음에 철거해야 된다라는 정치적 압력을 취한다면 향후에 이 부분은 오히려 일본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김용준: 지금 교수님 일본은 지금 베를린 말고도 독일 쾰른 카셀에 설치된 소녀상에 대해서도 대응하겠다고 예고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소녀상 철거를 하기 위한 압박을 내리고 있는 것들이 이 작은 소녀상의 철거에 집착하는 그런 이유들 이거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록: 그게 참 중요한데요. 지금 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만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회고록을 보게 되면 내가 한국 대사 독일 대사에게 명확하게 지시했다. 지금 와인이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가서 싸워라. 소녀상에 대해서라고 지시를 했다라고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런데 소녀상은 잘 아시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상징이고 그와 같은 피해가 다시 발생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의 상징이잖아요. 조그마한 동상입니다. 그런데 그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서 혹은 설치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의 총리 대신 그 다음에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시민단체. 총력전이에요. 거국적으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에요.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이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지워버리겠다 부정하겠다라고 하는 모습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공식적인 입장은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진다. 책임을 통감한다 사죄하고 반성한다라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것은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 일본 사회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검증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부분은 저로서는 매우 기이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용준: 지금 듣다 보니까 말씀 듣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독일처럼 아까 작가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성하고 인정했을 때 사과를 하면 안 되는 일인가 싶은데 이게 일본 사회 내에서 일본 국민들에서부터도 아까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총력전을 펼치는 것처럼 비슷한 그런 흐름이 있는 건지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것인가 했을 때 일본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정말 그렇게 크게 많은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김창록: 일본 사회라고 해서 한 덩어리는 아닙니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 재판소에 4건이나 소송이 제기됐었거든요. 관련해서 그 소송은 일본 시민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리고 그 소송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고요. 그다음에 그 두 국가에서의 소송은 결국은 원고가 패소를 했습니다만 피해자들이 그런데 한국에서 마침내 소송이 제기되어서 2021년에 그리고 2023년에 그리고 최근에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판결은 일본 시민들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런 시민들이 있고요. 하지만 일본 사회 전반이 2012년 이후에 역사 부정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건 정치 일본의 정치 세력과 언론이 그쪽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시민들 간의 대화 국민들 간의 대화는 지속이 돼야 되고요. 그것을 통해서 일본 시민들과 우리가 함께 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미래 지향이라고 하죠. 그런데 미래 지향이 과거를 지우자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이 쓰여져요. 미래 지향. 지향이라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거 아닙니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간다 어떤 미래 그걸 물어야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그런 미래로 가자는 말이냐 그건 단호히 거부할 수밖에 없죠. 그런 미래는 지향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한일 양국 시민들이 그래서 그래서 인권을 확산시키는 그런 미래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김용준: 작가님께도 마지막으로 여쭤볼게요. 올해가 광복 8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일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한일 관계와 관련된 어떤 원칙을 재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을 우리가 재확인하고 또 어떻게 우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들어보겠습니다.

▼박광일: 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굉장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함께 가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역사 문제 부분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부터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거기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은 찾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이런 부분들을 정리해 나간다면 향후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조금 더 건전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본 정부만 또 한국 정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일본 시민사회와 한국 시민사회가 건전한 상식 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건가라고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조금 더 중요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게 이제 정부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지만 정치권이나 언론이 왜곡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서 여기에 대한 공감대를 먼저 만들고 이게 단순하게 일본과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기 위한 우리의 기본적인 소양의 문제다라는 것들을 인식하고 그리고 이제 일본에 대해서 어떻게 그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건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일본 안에서도 그걸 받아들일 시민사회가 있고 그들의 힘이 조금 더 커진다면 그걸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이 소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김용준: 지금까지 박광일 역사작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와 말씀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창록: 수고하셨습니다.

◎김용준: 광복 80주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광복을 맞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남겨진 이들, 그리고 미완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8월 14일 목요일 특집 사사건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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