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그렇다면 일제가 그렇게 은폐하려 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은 어떤 사건인지 박예원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지금은 화성시가 된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 일본 군인 13명이 들이닥쳤습니다.
만세 시위로 뒤숭숭해진 마을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30명 넘는 사람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 세기가 가깝게 흘렀지만 희생자 후손들에게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오는 생생한 고통입니다.
<인터뷰> 안용웅(당시 조부, 증조부 사망):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자고 하잖아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자기 부모가 자기 조상이 그렇게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같은 사실은 제암리를 방문한 선교사들과 외신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일본인들이나 종교집단에서 화해를 청하며 제암리를 방문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표명은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록의 발견을 계기로 묻혀 있는 당시 관련자의 생생한 증언이 더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환(수원대 교수): "아리따 중위가 나중에 대마도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기록이라던가 수기나 일기가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월에 묻혔던 일제의 잔인한 학살 전모가 드러나면서 3.1 절의 의미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KBS 뉴스 박예원입니다.
그렇다면 일제가 그렇게 은폐하려 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은 어떤 사건인지 박예원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지금은 화성시가 된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 일본 군인 13명이 들이닥쳤습니다.
만세 시위로 뒤숭숭해진 마을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30명 넘는 사람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 세기가 가깝게 흘렀지만 희생자 후손들에게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오는 생생한 고통입니다.
<인터뷰> 안용웅(당시 조부, 증조부 사망):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자고 하잖아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자기 부모가 자기 조상이 그렇게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같은 사실은 제암리를 방문한 선교사들과 외신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일본인들이나 종교집단에서 화해를 청하며 제암리를 방문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표명은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록의 발견을 계기로 묻혀 있는 당시 관련자의 생생한 증언이 더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환(수원대 교수): "아리따 중위가 나중에 대마도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기록이라던가 수기나 일기가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월에 묻혔던 일제의 잔인한 학살 전모가 드러나면서 3.1 절의 의미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KBS 뉴스 박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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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암리 학살 사건이란?
-
- 입력 2007-02-28 21:16:56
- 수정2007-02-28 22:36:05
<앵커 멘트>
그렇다면 일제가 그렇게 은폐하려 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은 어떤 사건인지 박예원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지금은 화성시가 된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 일본 군인 13명이 들이닥쳤습니다.
만세 시위로 뒤숭숭해진 마을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30명 넘는 사람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 세기가 가깝게 흘렀지만 희생자 후손들에게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오는 생생한 고통입니다.
<인터뷰> 안용웅(당시 조부, 증조부 사망):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자고 하잖아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자기 부모가 자기 조상이 그렇게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같은 사실은 제암리를 방문한 선교사들과 외신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일본인들이나 종교집단에서 화해를 청하며 제암리를 방문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표명은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록의 발견을 계기로 묻혀 있는 당시 관련자의 생생한 증언이 더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환(수원대 교수): "아리따 중위가 나중에 대마도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기록이라던가 수기나 일기가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월에 묻혔던 일제의 잔인한 학살 전모가 드러나면서 3.1 절의 의미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KBS 뉴스 박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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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원 기자 ai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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