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부관 연락선'을 아십니까?
일제시대에 한국인 징용자나 징병자를 일본으로 수송하던 밴데요,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할아버지 두분이 광복절을 이틀 앞둔 오늘 다시 이 배에 올랐습니다.
이승준 기자가 동행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시대 한국과 일본을 잇던 유일한 해상교통수단이었던 부관 연락선.
일본은 당시 하루 3천명의 한국인 징용.징병자들을 이 배로 실어날랐습니다.
지난 44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이 뱃길을 따라 일본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던 이천구 할아버지, 63년만에 지금은 관광선으로 변한 배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파도가 심하면 서로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쪽으로 흔들리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토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별별사람 많죠. 지금으 방이 있지만 그때는 마루방이니까."
제철소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한 지 1년만에 해방을 맞아 운좋게 귀국길에 올랐지만 당시의 악몽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언제 죽을지 언제 살아서 돌아올지도 몰고 노예의 일종이죠. 노예처럼 끌려가는 거죠. 목에 줄만 안맺지 노예나 마찬가지죠."
한 많은 뱃길을 따라 다시 찾은 시모노세키항, 일가족과 함께 강제 징용된 정성태 할아버지는 금새 64년전으로 돌아갑니다.
<인터뷰> 정성태(82세/일본 탄광 강제 노역) : "나이 16살 때 일본에 들어왔는데 그때도 갈매기가 오늘같이 앉아가지고..."
미쓰이 탄광으로 끌려와 매일 생사를 넘나들던 와중에 맞은 광복의 기쁨은 잊을 수없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한국사람들 이제 살았다. 고향간다. 박수치고. 그러니까 일본 놈들은 입도 못열고 가만히 있고...그때 기분이야 말도 못하죠."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머니와 동생은 사할린에 남고 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던 아버지와도 이후 연락이 끊겨 온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할아버지 나 왔어요하니까 날 보면서 니 왔나? 그래도 아들이 더 가까워던 모양인지 너희 아바이는 이러더라구요?"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일제 강점기 징용 징병자는 확인된 사람만 5만여 명.
그들에게 여전이 남아있는 고통과 수탈의 기억은 오늘날 광복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되살려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승준입니다.
'부관 연락선'을 아십니까?
일제시대에 한국인 징용자나 징병자를 일본으로 수송하던 밴데요,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할아버지 두분이 광복절을 이틀 앞둔 오늘 다시 이 배에 올랐습니다.
이승준 기자가 동행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시대 한국과 일본을 잇던 유일한 해상교통수단이었던 부관 연락선.
일본은 당시 하루 3천명의 한국인 징용.징병자들을 이 배로 실어날랐습니다.
지난 44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이 뱃길을 따라 일본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던 이천구 할아버지, 63년만에 지금은 관광선으로 변한 배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파도가 심하면 서로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쪽으로 흔들리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토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별별사람 많죠. 지금으 방이 있지만 그때는 마루방이니까."
제철소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한 지 1년만에 해방을 맞아 운좋게 귀국길에 올랐지만 당시의 악몽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언제 죽을지 언제 살아서 돌아올지도 몰고 노예의 일종이죠. 노예처럼 끌려가는 거죠. 목에 줄만 안맺지 노예나 마찬가지죠."
한 많은 뱃길을 따라 다시 찾은 시모노세키항, 일가족과 함께 강제 징용된 정성태 할아버지는 금새 64년전으로 돌아갑니다.
<인터뷰> 정성태(82세/일본 탄광 강제 노역) : "나이 16살 때 일본에 들어왔는데 그때도 갈매기가 오늘같이 앉아가지고..."
미쓰이 탄광으로 끌려와 매일 생사를 넘나들던 와중에 맞은 광복의 기쁨은 잊을 수없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한국사람들 이제 살았다. 고향간다. 박수치고. 그러니까 일본 놈들은 입도 못열고 가만히 있고...그때 기분이야 말도 못하죠."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머니와 동생은 사할린에 남고 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던 아버지와도 이후 연락이 끊겨 온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할아버지 나 왔어요하니까 날 보면서 니 왔나? 그래도 아들이 더 가까워던 모양인지 너희 아바이는 이러더라구요?"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일제 강점기 징용 징병자는 확인된 사람만 5만여 명.
그들에게 여전이 남아있는 고통과 수탈의 기억은 오늘날 광복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되살려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승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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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많은 뱃길따라…‘부관 연락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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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08-08-13 21:14:52
<앵커멘트>
'부관 연락선'을 아십니까?
일제시대에 한국인 징용자나 징병자를 일본으로 수송하던 밴데요,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할아버지 두분이 광복절을 이틀 앞둔 오늘 다시 이 배에 올랐습니다.
이승준 기자가 동행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시대 한국과 일본을 잇던 유일한 해상교통수단이었던 부관 연락선.
일본은 당시 하루 3천명의 한국인 징용.징병자들을 이 배로 실어날랐습니다.
지난 44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이 뱃길을 따라 일본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던 이천구 할아버지, 63년만에 지금은 관광선으로 변한 배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파도가 심하면 서로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쪽으로 흔들리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토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별별사람 많죠. 지금으 방이 있지만 그때는 마루방이니까."
제철소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한 지 1년만에 해방을 맞아 운좋게 귀국길에 올랐지만 당시의 악몽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인터뷰> 이천구(일본 제철소 강제 노역) : "언제 죽을지 언제 살아서 돌아올지도 몰고 노예의 일종이죠. 노예처럼 끌려가는 거죠. 목에 줄만 안맺지 노예나 마찬가지죠."
한 많은 뱃길을 따라 다시 찾은 시모노세키항, 일가족과 함께 강제 징용된 정성태 할아버지는 금새 64년전으로 돌아갑니다.
<인터뷰> 정성태(82세/일본 탄광 강제 노역) : "나이 16살 때 일본에 들어왔는데 그때도 갈매기가 오늘같이 앉아가지고..."
미쓰이 탄광으로 끌려와 매일 생사를 넘나들던 와중에 맞은 광복의 기쁨은 잊을 수없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한국사람들 이제 살았다. 고향간다. 박수치고. 그러니까 일본 놈들은 입도 못열고 가만히 있고...그때 기분이야 말도 못하죠."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머니와 동생은 사할린에 남고 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던 아버지와도 이후 연락이 끊겨 온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정성태(일본 탄광 강제 노역) : "할아버지 나 왔어요하니까 날 보면서 니 왔나? 그래도 아들이 더 가까워던 모양인지 너희 아바이는 이러더라구요?"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일제 강점기 징용 징병자는 확인된 사람만 5만여 명.
그들에게 여전이 남아있는 고통과 수탈의 기억은 오늘날 광복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되살려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승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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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newsfocu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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