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포착] 마지막 성냥 공장을 지키는 이유

입력 2013.02.04 (08:42) 수정 2013.02.0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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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옛날에 집집마다 있던 육각성냥 기억하시죠?

아버지 담배 태우실 때, 그리고 집에 촛불 밝힐 때 요긴하게 쓰이던 필수품이었는데요.

성냥에 얽힌 추억들도 참 많죠.

성냥을 일일이 꺼내서 탑을 쌓던 기억, 그리고 남성분들은 영화 속의 주윤발 흉내 낸다고 성냥 물고 다니던 기억들 있을 겁니다.

네, 이것도 다 옛날 얘기가 돼버렸네요.

라이터가 나오고 가스, 전기시설이 보급되면서 성냥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는데요.

양영은 기자, 진짜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고요?

<기자 멘트>

네, 방금 성냥에 얽힌 추억을 얘기해주셨잖아요.

그런데 두 분 앵커, 성냥으로 불 켜보신 적 최근에 언제 있으세요?

그만큼 성냥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문데요.

그나마 요즘 쓰이는 성냥들도 대부분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된 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냥은요.

19세기 말 일본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시만 해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조선의 아낙들을 해방시킨 혁명적 물건이었습니다.

그 성냥이 국산화됐을 때, 그 감격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현장으로 갑니다.

<리포트>

유황을 굳혀 불을 붙이는 성냥.

하지만 이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녹취> 피디 : "'성냥'하면 드는 생각이 뭐예요?"

<녹취> 시민 : "성냥팔이 소녀?"

<녹취> 시민 : "성냥이라 하면 옛날 물건인 것 같아요."

<녹취> 시민 : "요즘도 성냥을 사용하나요?"

점차 추억 속 물건이 돼가고 있는데요.

오늘 화제포착에선 우리나라에 남은 마지막 성냥공장을 찾아갑니다.

나뭇개비들에 파라핀을 바른 뒤 빨간 두약에 머릿부분을 담가 만드는 성냥.

1950년대에는 성냥 한 곽이 쌀 한 가마니와 맞먹는 값이었답니다.

그러다 라이터와 가스의 보급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사라졌는데요.

혹시, 성냥에 얽힌 추억...있으세요?

<녹취> 김형호(대구광역시 봉덕3동) : "솥에 군불 땔 때 이렇게 (성냥으로) 불을 붙인단 말이에요. 시골 부엌에서요. 그걸 우리 봉하마을에서는 군불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추억이죠."

<녹취> 정인숙 사장(OO찻집/대구광역시 종로2가) : "어머니께서 화장하실 때 (성냥으로) 불을 켜시더니 그걸 꺼서 눈썹을 그리시더라고요. 그땐 요즘처럼 (눈썹) 연필이 없었잖아요. 저도 옆에 있으면 어머니께서 (눈썹을) 그려주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추억이 있죠."

1970년대, 전국에 3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던 성냥공장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경북 의성에 단 하나만 남았습니다.

1954년에 설립됐는데요.

문패는 다 낡아 읽기조차 힘들고 한창 때 270명이 넘던 종업원은 이제 1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녹취> 김금자(경상북도 의성군) :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사람도 많았고요. 그때만 해도 성냥이 잘 팔렸죠."

<녹취> 피디 : "그땐 굉장히 바쁘셨나요?"

<녹취> 김금자(경상북도 의성군) : "예. 많이 바빴죠."

연매출 70억 원을 기록하며 경북지역의 대표 공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 성냥공장은 이제 적자를 감내하며 이 땅의 마지막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진례, 마산, 부산 그리고 영덕, 강원도 거진까지 저희 성냥이 해변으로 주로 팔려나갔습니다."

이 회사 성냥은 특히 습기에 강해 뱃사람들이 좋아했다는데요.

지금은 국산 최초이자 단 하나 남은 성냥 윤전기도 저렇게 놀리는 날이 많습니다.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보시다시피 기계가 멈춰있지 않습니까? 너무 한산하잖아요. 이게 저의 아픔입니다."

그나마 간간히 들어오는 홍보성냥 주문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데요.

국산성냥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뜻에 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녹취> 손학익 상무(OO성냥공업사) : "15~16년 전에 (성냥) 수요가 없고 (매출이) 하향곡선이었는데 아버님께서 그만두지 못하시니까 (아버님께서) 성냥을 지켜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셔서 아버님 뜻을 제가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경영난으로 성냥 제조설비 가운데 두 대를 최근 동남아에 팔 수 밖에 없었다는데요.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접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요?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제가 어릴 때부터 이 공장에 입사해서 이때까지 일생을 바친 공장입니다. 그래서 (공장의) 문을 닫고 그만둔다는 것은 쾌히 승낙할 수가 없어요."

이런 부자의 뜻이 있어서인지 최근엔 문화체험관 조성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녹취> 손학익 상무(OO성냥공업사) : "주목적은 성냥생산시설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불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성냥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와서 보고 만들어보고 체험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사라져가는 1960~70년대 생활현장을 근대문화로 보존하고자 노력중인데요.

<인터뷰> 천진기 관장(국립민속박물관) : "전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성냥공장을 국립민속박물관이 기록하고 전시하고 연구해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미 맥이 끊긴 상태여서 그나마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한편 이웃 일본은 정부의 지원 아래 상품의 다양화와 해외수출 등으로 근대문화를 지켜가고 있는데요.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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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포착] 마지막 성냥 공장을 지키는 이유
    • 입력 2013-02-04 08:46:39
    • 수정2013-02-04 11: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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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옛날에 집집마다 있던 육각성냥 기억하시죠? 아버지 담배 태우실 때, 그리고 집에 촛불 밝힐 때 요긴하게 쓰이던 필수품이었는데요. 성냥에 얽힌 추억들도 참 많죠. 성냥을 일일이 꺼내서 탑을 쌓던 기억, 그리고 남성분들은 영화 속의 주윤발 흉내 낸다고 성냥 물고 다니던 기억들 있을 겁니다. 네, 이것도 다 옛날 얘기가 돼버렸네요. 라이터가 나오고 가스, 전기시설이 보급되면서 성냥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는데요. 양영은 기자, 진짜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고요? <기자 멘트> 네, 방금 성냥에 얽힌 추억을 얘기해주셨잖아요. 그런데 두 분 앵커, 성냥으로 불 켜보신 적 최근에 언제 있으세요? 그만큼 성냥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문데요. 그나마 요즘 쓰이는 성냥들도 대부분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된 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냥은요. 19세기 말 일본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시만 해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조선의 아낙들을 해방시킨 혁명적 물건이었습니다. 그 성냥이 국산화됐을 때, 그 감격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현장으로 갑니다. <리포트> 유황을 굳혀 불을 붙이는 성냥. 하지만 이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녹취> 피디 : "'성냥'하면 드는 생각이 뭐예요?" <녹취> 시민 : "성냥팔이 소녀?" <녹취> 시민 : "성냥이라 하면 옛날 물건인 것 같아요." <녹취> 시민 : "요즘도 성냥을 사용하나요?" 점차 추억 속 물건이 돼가고 있는데요. 오늘 화제포착에선 우리나라에 남은 마지막 성냥공장을 찾아갑니다. 나뭇개비들에 파라핀을 바른 뒤 빨간 두약에 머릿부분을 담가 만드는 성냥. 1950년대에는 성냥 한 곽이 쌀 한 가마니와 맞먹는 값이었답니다. 그러다 라이터와 가스의 보급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사라졌는데요. 혹시, 성냥에 얽힌 추억...있으세요? <녹취> 김형호(대구광역시 봉덕3동) : "솥에 군불 땔 때 이렇게 (성냥으로) 불을 붙인단 말이에요. 시골 부엌에서요. 그걸 우리 봉하마을에서는 군불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추억이죠." <녹취> 정인숙 사장(OO찻집/대구광역시 종로2가) : "어머니께서 화장하실 때 (성냥으로) 불을 켜시더니 그걸 꺼서 눈썹을 그리시더라고요. 그땐 요즘처럼 (눈썹) 연필이 없었잖아요. 저도 옆에 있으면 어머니께서 (눈썹을) 그려주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추억이 있죠." 1970년대, 전국에 3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던 성냥공장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경북 의성에 단 하나만 남았습니다. 1954년에 설립됐는데요. 문패는 다 낡아 읽기조차 힘들고 한창 때 270명이 넘던 종업원은 이제 1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녹취> 김금자(경상북도 의성군) :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사람도 많았고요. 그때만 해도 성냥이 잘 팔렸죠." <녹취> 피디 : "그땐 굉장히 바쁘셨나요?" <녹취> 김금자(경상북도 의성군) : "예. 많이 바빴죠." 연매출 70억 원을 기록하며 경북지역의 대표 공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 성냥공장은 이제 적자를 감내하며 이 땅의 마지막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진례, 마산, 부산 그리고 영덕, 강원도 거진까지 저희 성냥이 해변으로 주로 팔려나갔습니다." 이 회사 성냥은 특히 습기에 강해 뱃사람들이 좋아했다는데요. 지금은 국산 최초이자 단 하나 남은 성냥 윤전기도 저렇게 놀리는 날이 많습니다.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보시다시피 기계가 멈춰있지 않습니까? 너무 한산하잖아요. 이게 저의 아픔입니다." 그나마 간간히 들어오는 홍보성냥 주문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데요. 국산성냥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뜻에 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녹취> 손학익 상무(OO성냥공업사) : "15~16년 전에 (성냥) 수요가 없고 (매출이) 하향곡선이었는데 아버님께서 그만두지 못하시니까 (아버님께서) 성냥을 지켜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셔서 아버님 뜻을 제가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경영난으로 성냥 제조설비 가운데 두 대를 최근 동남아에 팔 수 밖에 없었다는데요.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접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요? <녹취> 손진국 대표(OO성냥공업사) : "제가 어릴 때부터 이 공장에 입사해서 이때까지 일생을 바친 공장입니다. 그래서 (공장의) 문을 닫고 그만둔다는 것은 쾌히 승낙할 수가 없어요." 이런 부자의 뜻이 있어서인지 최근엔 문화체험관 조성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녹취> 손학익 상무(OO성냥공업사) : "주목적은 성냥생산시설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불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성냥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와서 보고 만들어보고 체험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사라져가는 1960~70년대 생활현장을 근대문화로 보존하고자 노력중인데요. <인터뷰> 천진기 관장(국립민속박물관) : "전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성냥공장을 국립민속박물관이 기록하고 전시하고 연구해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미 맥이 끊긴 상태여서 그나마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한편 이웃 일본은 정부의 지원 아래 상품의 다양화와 해외수출 등으로 근대문화를 지켜가고 있는데요.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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