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위안부 증언’ 30년…‘1991 도쿄 증언’ 최초 입수
입력 2021.08.13 (21:45)
수정 2021.08.14 (07:5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어린이들이 정성스레 심은 꽃씨가 싹을 틔우더니 제법 잎을 내밀었습니다.
부산의 500여 가정에서 저마다 키우고 있는 이 봉선화, 며칠뒤 부산 소녀상이 있는 초량동 항일거리 꽃밭에 옹기종기 심어질 예정입니다.
이 작은 봉선화 꽃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소녀상 마음을 위로하듯 붉은 꽃잎이 조만간 한가득 피기를 기대해 봅니다.
내일, 8월 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지 꼭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부는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해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30년 전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건너가, 위안부의 존재를 직접 알렸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먼저 신지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김학순 할머니가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를 입고 강당에 들어섭니다.
'일본군 위안부'임을 국내에서 공개 증언하고 석 달 뒤인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도쿄의 증언대에 올랐습니다.
17살 소녀가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50년 만에 일본인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되니까."]
천식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찬찬히 말을 이어 갔습니다.
50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땐 눈물을 훔쳤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깃발만 봐도 지금까지도 치가 떨려요. 50년 전에 보던 그 다다미방인데 '내가 이 다다미방에 또 왔구나' 하는데 참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할머니가 일본인들 앞에 선 건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없었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와 가지고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내가 그 위안부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정부에서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 있는데..."]
할머니가 30년 전,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 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서도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됐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KBS 뉴스 신지수입니다.
[영상제공 : 정의기억연대]
어린이들이 정성스레 심은 꽃씨가 싹을 틔우더니 제법 잎을 내밀었습니다.
부산의 500여 가정에서 저마다 키우고 있는 이 봉선화, 며칠뒤 부산 소녀상이 있는 초량동 항일거리 꽃밭에 옹기종기 심어질 예정입니다.
이 작은 봉선화 꽃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소녀상 마음을 위로하듯 붉은 꽃잎이 조만간 한가득 피기를 기대해 봅니다.
내일, 8월 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지 꼭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부는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해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30년 전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건너가, 위안부의 존재를 직접 알렸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먼저 신지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김학순 할머니가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를 입고 강당에 들어섭니다.
'일본군 위안부'임을 국내에서 공개 증언하고 석 달 뒤인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도쿄의 증언대에 올랐습니다.
17살 소녀가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50년 만에 일본인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되니까."]
천식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찬찬히 말을 이어 갔습니다.
50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땐 눈물을 훔쳤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깃발만 봐도 지금까지도 치가 떨려요. 50년 전에 보던 그 다다미방인데 '내가 이 다다미방에 또 왔구나' 하는데 참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할머니가 일본인들 앞에 선 건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없었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와 가지고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내가 그 위안부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정부에서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 있는데..."]
할머니가 30년 전,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 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서도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됐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KBS 뉴스 신지수입니다.
[영상제공 : 정의기억연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김학순 ‘위안부 증언’ 30년…‘1991 도쿄 증언’ 최초 입수
-
- 입력 2021-08-13 21:45:29
- 수정2021-08-14 07:53:02
[앵커]
어린이들이 정성스레 심은 꽃씨가 싹을 틔우더니 제법 잎을 내밀었습니다.
부산의 500여 가정에서 저마다 키우고 있는 이 봉선화, 며칠뒤 부산 소녀상이 있는 초량동 항일거리 꽃밭에 옹기종기 심어질 예정입니다.
이 작은 봉선화 꽃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소녀상 마음을 위로하듯 붉은 꽃잎이 조만간 한가득 피기를 기대해 봅니다.
내일, 8월 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지 꼭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부는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해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30년 전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건너가, 위안부의 존재를 직접 알렸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먼저 신지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김학순 할머니가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를 입고 강당에 들어섭니다.
'일본군 위안부'임을 국내에서 공개 증언하고 석 달 뒤인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도쿄의 증언대에 올랐습니다.
17살 소녀가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50년 만에 일본인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되니까."]
천식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찬찬히 말을 이어 갔습니다.
50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땐 눈물을 훔쳤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깃발만 봐도 지금까지도 치가 떨려요. 50년 전에 보던 그 다다미방인데 '내가 이 다다미방에 또 왔구나' 하는데 참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할머니가 일본인들 앞에 선 건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없었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와 가지고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내가 그 위안부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정부에서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 있는데..."]
할머니가 30년 전,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 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서도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됐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KBS 뉴스 신지수입니다.
[영상제공 : 정의기억연대]
어린이들이 정성스레 심은 꽃씨가 싹을 틔우더니 제법 잎을 내밀었습니다.
부산의 500여 가정에서 저마다 키우고 있는 이 봉선화, 며칠뒤 부산 소녀상이 있는 초량동 항일거리 꽃밭에 옹기종기 심어질 예정입니다.
이 작은 봉선화 꽃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소녀상 마음을 위로하듯 붉은 꽃잎이 조만간 한가득 피기를 기대해 봅니다.
내일, 8월 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지 꼭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부는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해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30년 전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건너가, 위안부의 존재를 직접 알렸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먼저 신지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김학순 할머니가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를 입고 강당에 들어섭니다.
'일본군 위안부'임을 국내에서 공개 증언하고 석 달 뒤인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도쿄의 증언대에 올랐습니다.
17살 소녀가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50년 만에 일본인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되니까."]
천식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찬찬히 말을 이어 갔습니다.
50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땐 눈물을 훔쳤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깃발만 봐도 지금까지도 치가 떨려요. 50년 전에 보던 그 다다미방인데 '내가 이 다다미방에 또 왔구나' 하는데 참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할머니가 일본인들 앞에 선 건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없었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와 가지고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내가 그 위안부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일본 정부에서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 있는데..."]
할머니가 30년 전,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김학순 할머니/1991년 도쿄 증언 :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 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서도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됐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KBS 뉴스 신지수입니다.
[영상제공 : 정의기억연대]
-
-
신지수 기자 js@kbs.co.kr
신지수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