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 속에도 ‘독립운동’ 굳건해진 이유는?

입력 2025.08.14 (19:25) 수정 2025.08.1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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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 청주방송총국의 광복 80주년 기획 보도, 11번째 순서입니다.

우리 독립운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지독한 탄압에도 어떻게 수십년 동안 강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 연구 결과를 조진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을사늑약 이후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허위 선생입니다.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수많은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 토벌대와 맞섰습니다.

1908년 5월, 일본군에게 잡혀 그 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일제의 강한 압박에 구심점마저 사라지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어떻게 수십 년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까?

국내 한 대학 연구진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독립운동가 1,624명을 연결망으로 구성해 그 이유를 알아본 연구 결과입니다.

독립운동 초기엔 한두 사람에 크게 의존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중심축이 나타납니다.

한 독립운동 조직과 다른 조직 사이에는 연결이 약한 모습도 보입니다.

핵심 인물 한두 사람이 잡혀가서 일부 조직이 붕괴하더라도 전체 독립운동은 유지되는 거미줄 구조로 진화한겁니다.

[신은경/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응집된 조직들이 더 저항 운동에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굉장히 특이하게 분절성이 어느정도 확보돼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고요."]

특히 여러 지역,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한 점도 독립운동 연결망을 더 굳건하게 만든 요인으로 분석됐습니다.

투쟁 방식이나 종교, 지역이 고루 섞여 있지만 서로를 문제 삼기보다 공동의 목표인 독립을 향해 협력하는 모습이 발견됐다는겁니다.

["오늘날의 정치를 생각하면 화합하기 힘든 (심리적) 거리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 커다란 정치적 대의(독립)를 위해 지엽적인 차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크게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연결망은 후반부로 갈수록 김구, 이승만 등 주요 명망가 중심 구조로 변화합니다.

연구자는 이러한 변화가 국가 구성원들이 신민에서 시민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에요. 나를 통치하는 왕이 있던 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내가 왕을 뽑는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그 51년의 여정인 것이거든요."]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시민으로 성장해나간 연결망 속 독립운동가들의 모습.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KBS 뉴스 조진영입니다.

촬영기자:박준규/그래픽: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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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압 속에도 ‘독립운동’ 굳건해진 이유는?
    • 입력 2025-08-14 19:25:30
    • 수정2025-08-14 19:37:12
    뉴스7(청주)
[앵커]

KBS 청주방송총국의 광복 80주년 기획 보도, 11번째 순서입니다.

우리 독립운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지독한 탄압에도 어떻게 수십년 동안 강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 연구 결과를 조진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을사늑약 이후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허위 선생입니다.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수많은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 토벌대와 맞섰습니다.

1908년 5월, 일본군에게 잡혀 그 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일제의 강한 압박에 구심점마저 사라지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어떻게 수십 년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까?

국내 한 대학 연구진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독립운동가 1,624명을 연결망으로 구성해 그 이유를 알아본 연구 결과입니다.

독립운동 초기엔 한두 사람에 크게 의존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중심축이 나타납니다.

한 독립운동 조직과 다른 조직 사이에는 연결이 약한 모습도 보입니다.

핵심 인물 한두 사람이 잡혀가서 일부 조직이 붕괴하더라도 전체 독립운동은 유지되는 거미줄 구조로 진화한겁니다.

[신은경/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응집된 조직들이 더 저항 운동에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굉장히 특이하게 분절성이 어느정도 확보돼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고요."]

특히 여러 지역,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한 점도 독립운동 연결망을 더 굳건하게 만든 요인으로 분석됐습니다.

투쟁 방식이나 종교, 지역이 고루 섞여 있지만 서로를 문제 삼기보다 공동의 목표인 독립을 향해 협력하는 모습이 발견됐다는겁니다.

["오늘날의 정치를 생각하면 화합하기 힘든 (심리적) 거리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 커다란 정치적 대의(독립)를 위해 지엽적인 차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크게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연결망은 후반부로 갈수록 김구, 이승만 등 주요 명망가 중심 구조로 변화합니다.

연구자는 이러한 변화가 국가 구성원들이 신민에서 시민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에요. 나를 통치하는 왕이 있던 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내가 왕을 뽑는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그 51년의 여정인 것이거든요."]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시민으로 성장해나간 연결망 속 독립운동가들의 모습.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KBS 뉴스 조진영입니다.

촬영기자:박준규/그래픽: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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