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총선, 빛 바랜 오렌지 혁명

입력 2006.03.3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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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 퇴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말 여당의 선거 부정에 분노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항의가 오렌지 혁명이라는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져 세계를 감동시켰는데요.

하지만 며칠 전 총선거에서 다시 친 러시아 성향의 정당이 1위를 차지하면서 구호뿐인 혁명의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신성범 특파원이 우크라이나 동쪽 지방의 탄광촌을 찾아서 빛바랜 오렌지 혁명의 현주소를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한반도의 네배 넓이... 우크라이나 평원은 찰진 검은 땅입니다. '흑토지대'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 띄엄띄엄 작은 산이 솟아 있습니다. 석탄을 캐내고 남은 찌꺼기가 쌓여 산으로 변했습니다.

소련시절 중화학 공업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경제의 중심지인 돈바스 탄광지대입니다. 돈바스 지방에 있는 수십개의 탄광 가운데 한 곳 광부들의 출근길입니다. 한때는 땅만 파면 석탄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땅속 천 미터가 넘는 막장이 광부들의 일터입니다.

지열이 35도를 웃돌아 하루 4교대 6시간 근무가 기본입니다. 지층의 특성상 메탄가스가 많이 고여 돈바스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광부가 지난 10년동안 한 해 350명꼴입니다. 오후 6시, 일을 끝낸 광부들이 지친 표정으로 퇴근길을 서두릅니다. 석탄가루가 온 몸을 뒤덮어 눈만 반짝입니다. 돈바스 탄광 지대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광부가 20만명입니다.

<녹취>바실리 돈바스 (탄광 광부): "이전에는 회사에서 점심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작업복 바지까지 내가 사야 합니다."

탄광 생활 33년째라는 늙은 광부는 보드카 냄새를 풍기며 목욕탕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고르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가득쌓인 석탄이 눈에 띠었습니다. 때로는 월급 대신 때로는 보너스로 받아온 석탄입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여기에는 탄광외에는 일할데가 없습니다."

집안의 난방도, 음식 조리도 모두 석탄불입니다. 방이래야 서너평 넓이에 침대 두개가 가재도구의 전부입니다. 이 단칸방에서 부인과 아들 두명 까지 네 식구가 먹고 잡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한달 월급이 1,000에서 1,200그리브나(약25만원)인데 먹을것 사면 끝입니다."


광부 생활 19년째, 이고르씨는 마흔 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어보였습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돼지라도 키우는 것이 집사람의 꿈입니다.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고르는 광부들 가운데 자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이 직장에 나가고 텃밭이라도 있어 감자와 배추를 심고 닭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고르씨가 사는 '샥조르스크'는 6만명의 주민 가운데 광부가 7천명으로 도시전체가 석탄으로 먹고삽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시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구동성 오렌지 혁명 이후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미하일 ('샥조르스크'시 주민): "정부가 한 말은 모두 껍데기뿐인 빈 약속으로 지켜진 것이 없습니다."

<녹취>카테리나 ('샥조르스크'시 주민): "우리 생활은 더 어려워졌지만 정부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였습니다. 2004년 12% 였던 우크라이나의 경제 성장율은 지난해는 2%,올해초는 1.5%까지 떨어졌습니다.

<녹취>그레고리 (시장 상인): "공장은 문을 닫고 생활수준은 떨어지는데다 탄광도 계속 내리막길입니다."

수퍼 마켓에는 유럽에서 넘어온 수입품들이 쌓여 있지만 정부가 약속했던 임금 인상보다 물가가 더 많이 올랐습니다.

<녹취>율랴 ('샥조르스크'시 주민): "한 병에 4그리브나 하던 우유가 지난겨울에는 8그리브나로 올랐습니다."


이 탄광도시 주민들의 관심은 유럽연합 가입이냐, 친 러시아 정책이냐, 같은 큰 이야기가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오렌지 혁명으로 정치적 자유는 누리게 됐지만 혁명이후 지난 1년 석 달간의 정치경제 상황은 적어도 이곳 돈바스 지방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곧바로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고 생활형편도 눈에 띠게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도 많았고 기대감도 컸던 만큼 주민들의 실망감도 더 커 보였습니다.

동서로 갈려있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방이 원래 친 러시아 성향이 압도적이라고는 하지만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여당 지지는 겨우 1.5%였습니다. 고려인 3세로 도네츠크의 신문사 편집국장인 박 블라디미르 씨는 선거결과를 야당의 승리라기 보다는 유센코의 패배라고 표현했습니다.

<녹취>박블라디미르 ('석간도네츠크'편집국장): "일자리 500만개 창출이니 평균임금 두세배 인상등 정부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선거가 끝난 우크라이나의 앞날은 어떤 연립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센코 대통령으로서는 오랜 정적인 야누코비치에 손을 내미느냐 혁명 동지였던 율랴 티모센코 전 총리와 다시 손을 잡느냐 선택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국민들이 혁명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차가운 현실에 좌절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친 러시아냐 친 서방이냐의 갈림길에 다시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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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 총선, 빛 바랜 오렌지 혁명
    • 입력 2006-03-31 10:31:20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 퇴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말 여당의 선거 부정에 분노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항의가 오렌지 혁명이라는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져 세계를 감동시켰는데요. 하지만 며칠 전 총선거에서 다시 친 러시아 성향의 정당이 1위를 차지하면서 구호뿐인 혁명의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신성범 특파원이 우크라이나 동쪽 지방의 탄광촌을 찾아서 빛바랜 오렌지 혁명의 현주소를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한반도의 네배 넓이... 우크라이나 평원은 찰진 검은 땅입니다. '흑토지대'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 띄엄띄엄 작은 산이 솟아 있습니다. 석탄을 캐내고 남은 찌꺼기가 쌓여 산으로 변했습니다. 소련시절 중화학 공업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경제의 중심지인 돈바스 탄광지대입니다. 돈바스 지방에 있는 수십개의 탄광 가운데 한 곳 광부들의 출근길입니다. 한때는 땅만 파면 석탄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땅속 천 미터가 넘는 막장이 광부들의 일터입니다. 지열이 35도를 웃돌아 하루 4교대 6시간 근무가 기본입니다. 지층의 특성상 메탄가스가 많이 고여 돈바스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광부가 지난 10년동안 한 해 350명꼴입니다. 오후 6시, 일을 끝낸 광부들이 지친 표정으로 퇴근길을 서두릅니다. 석탄가루가 온 몸을 뒤덮어 눈만 반짝입니다. 돈바스 탄광 지대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광부가 20만명입니다. <녹취>바실리 돈바스 (탄광 광부): "이전에는 회사에서 점심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작업복 바지까지 내가 사야 합니다." 탄광 생활 33년째라는 늙은 광부는 보드카 냄새를 풍기며 목욕탕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고르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가득쌓인 석탄이 눈에 띠었습니다. 때로는 월급 대신 때로는 보너스로 받아온 석탄입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여기에는 탄광외에는 일할데가 없습니다." 집안의 난방도, 음식 조리도 모두 석탄불입니다. 방이래야 서너평 넓이에 침대 두개가 가재도구의 전부입니다. 이 단칸방에서 부인과 아들 두명 까지 네 식구가 먹고 잡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한달 월급이 1,000에서 1,200그리브나(약25만원)인데 먹을것 사면 끝입니다." 광부 생활 19년째, 이고르씨는 마흔 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어보였습니다. <녹취>이고르 돈바스 (탄광 광부): "돼지라도 키우는 것이 집사람의 꿈입니다.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고르는 광부들 가운데 자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이 직장에 나가고 텃밭이라도 있어 감자와 배추를 심고 닭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고르씨가 사는 '샥조르스크'는 6만명의 주민 가운데 광부가 7천명으로 도시전체가 석탄으로 먹고삽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시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구동성 오렌지 혁명 이후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미하일 ('샥조르스크'시 주민): "정부가 한 말은 모두 껍데기뿐인 빈 약속으로 지켜진 것이 없습니다." <녹취>카테리나 ('샥조르스크'시 주민): "우리 생활은 더 어려워졌지만 정부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였습니다. 2004년 12% 였던 우크라이나의 경제 성장율은 지난해는 2%,올해초는 1.5%까지 떨어졌습니다. <녹취>그레고리 (시장 상인): "공장은 문을 닫고 생활수준은 떨어지는데다 탄광도 계속 내리막길입니다." 수퍼 마켓에는 유럽에서 넘어온 수입품들이 쌓여 있지만 정부가 약속했던 임금 인상보다 물가가 더 많이 올랐습니다. <녹취>율랴 ('샥조르스크'시 주민): "한 병에 4그리브나 하던 우유가 지난겨울에는 8그리브나로 올랐습니다." 이 탄광도시 주민들의 관심은 유럽연합 가입이냐, 친 러시아 정책이냐, 같은 큰 이야기가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오렌지 혁명으로 정치적 자유는 누리게 됐지만 혁명이후 지난 1년 석 달간의 정치경제 상황은 적어도 이곳 돈바스 지방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곧바로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고 생활형편도 눈에 띠게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도 많았고 기대감도 컸던 만큼 주민들의 실망감도 더 커 보였습니다. 동서로 갈려있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방이 원래 친 러시아 성향이 압도적이라고는 하지만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여당 지지는 겨우 1.5%였습니다. 고려인 3세로 도네츠크의 신문사 편집국장인 박 블라디미르 씨는 선거결과를 야당의 승리라기 보다는 유센코의 패배라고 표현했습니다. <녹취>박블라디미르 ('석간도네츠크'편집국장): "일자리 500만개 창출이니 평균임금 두세배 인상등 정부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선거가 끝난 우크라이나의 앞날은 어떤 연립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센코 대통령으로서는 오랜 정적인 야누코비치에 손을 내미느냐 혁명 동지였던 율랴 티모센코 전 총리와 다시 손을 잡느냐 선택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국민들이 혁명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차가운 현실에 좌절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친 러시아냐 친 서방이냐의 갈림길에 다시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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