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김정일 위원장이 탄 특별열차가 북한과 러시아 국경을 통과했다.
김 위원장은 국경역인 하산에 내려 연해주 주지사의 영접을 받았다.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2002년 이후 9년만이다.
김 위원장은 아무르주 부래야를 거쳐 지난 23일 시베리아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이튿날에는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러시아 가스관 통과와 같은 경제협력과 북핵 6자회담 재개 방안 등을 폭넓게 논의했다.
김 위원장의 이번 방러에는 북한 조선노동당과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동행했다.
북중경협을 주도하는 매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비롯해 박도춘, 태종수 노동당 비서, 주규창 당 기계공업부장 박봉주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이 포함됐다.
6자회담과 남북문제와 같은 북한의 대외관계를 맡고 있는 강석주 내각부총리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도 수행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김 위원장의 넷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옥이다.
김옥은 김 위원장이 부레야 수력발전소 방명록에 서명할 때 바로 뒤에서 지켜봤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인 후계자 김정은은 이번 방러에 수행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1945년 집권 이래 54차례에 걸쳐 87개 나라를 방문했다.
가장 많이 방문한 국가는 단연 이웃인 중국과 구 소련이었다.
아버지가 북한을 비울 때마다 김정일 위원장은 늘 북한에 남아있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과거 김정일은 고등중학교 시절과 대학 졸업 직후에 김일성의 모스크바와 인도네시아 방문에 수행한 적은 있지만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김일성의 해외순방에 수행한 적이 없습니다. 김정일이 1983년에 중국을 방문한 것도 단독방문의 형식이었지 김일성의 방문에 수행하는 형식은 아니었습니다. "
김 위원장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이후 중국을 3차례나 방문했다.
김정은은 한 번도 동행하지 않았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그랬듯이 김 위원장이 후계자를 외국에 데리고 가지 않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최고지도자와 후계자가 동시에 북한을 비우는 상황에 불안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현재 지도자 김정일과 미래의 지도자 김정은이 동시에 평양을 비울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이 있죠. 예를 들어서 반대 세력이라든가 또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 군부의 여러 가지 동태를 고려해볼 때 지도자 중에 현재 지도자가 비울 때는 미래의 지도자가 평양을 지킨다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 봅니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 시절 김일성 주석이 거의 매년 외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통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의 부재 역시 김정은에게는 국정을 장악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김정은이 실질적으로 수업을 받는 형태, 그러면서 김정은이 내치를 장악하는 그런 장악력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지를 또 시험하는 이런 기간이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이나 방러에서 김정은의 어떤 그런 내부에서의 어떤 존재감 이런 부분들이 또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그런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 위원장을 첫날 방러 사실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도했다.
<녹취> 조선중앙tv (20일) :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러시아 연방 대통령 메드베데프 각하의 초청에 의하여 러시아 연방의 시베리아 및 원동지역을 비공식 방문하시게 됩니다."
또 수행자 명단과 러시아 방문 일정을 매일 중계방송 하듯이 전달하고 있다.
<녹취> 조선중앙tv (21일) : "김영춘 동지, 장성택 동지, 심국룡 동지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김 위원장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울란우데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던 그 시각 조선중앙tv는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영도 51주년 중앙보고대회를 중계했다.
이 자리에는 김정은의 최측근인 리영호 군총참모장과 김정각 군총정치국 제1부국장,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총출동했다.
북한 관영매체들의 보도는 김정은이 아버지 없이도 측근 실세들과 함께 내치를 흔들림없이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성격으로 보인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작년부터 김정일에게로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김정은을 통해서 올라가는 그런 시스템으로 구축됐기 때문에 현재 김정은이 국정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는데 특별한 문제점은 없습니다. 이번 김정일의 방러 일정에 대해서 북한이 신속하게 연일 보도하고 있는 것은 김정은이 이미 많은 권력을 물려받아서 김정일 없이도 북한을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해 5월 이후 중국을 3차례나 방문한데 이어 9년 만에 러시아까지 방문했다.
혈색이 좋아지고 살이 붙긴 했지만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렸다.
불편한 몸으로 1년 남짓한 기간에 네 차례나, 대륙을 가로지르는 강행군에 나서는 것은 절박함 때문이다.
북한은 핵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와 남북관계 악화로 고립무원의 처지다.
3대 세습을 맞아 야심차게 추진했던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경제난과 식량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 정치경제적 위기를 단숨에 돌파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방문 목적을 고려해도 김정은의 동행 필요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김정은이 만약에 동행했을 경우에 모든 언론의 관심은 김정은으로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 위원장의 방러의 어떤 그 성과라 할지 또는 흐름 자체를 또 완전 분산 시킬 수 있는 이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이번 방러의 주요 목적이 식량과 에너지 지원에 초점이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김정은을 동행해서 이뤄지는 것에 상관이 없기 때문에 김정은의 동행 여부가 이번에 초점이 아니고 동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권력의 3대 세습을 서둘러왔다.
김정은은 후계자 지명 1년여만에 인민군 대장이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직을 맡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가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우리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장직도 은밀하게 맡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 김위원장의 건강이 호전되고 있고, 20대인 김정은의 나이와 직책으로 볼 때 당장 정상외교 무대에 등장시키는 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지난 번 중국에 갈 때도 김정은의 동행여부가 초점이었는데 그것은 이제 만약 동행했다면 내년도 3대 세습을 앞두고 중국 지도부에게 김정은을 소개시키는 그런 측면으로 볼 수 있는데, 본인의 건강이 아직은 괜찮다는 측면에서 아직 직책을 공식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있는 김정은을 동행해서 러시아를 방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언제 외국 방문을 통한 정상외교를 시작할까.
내년, 2012년은 북한이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젖히겠다고 공언한 해이다.
더불어 김일성 출생 100주년, 김정일 출생 70주년, 김정은 출생 30주년을 맞는다.
북한은 내년에 김일성 주석 생일인 4월 15일에 맞춰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완료를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를 돌며 지원과 협조를 당부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에 팔을 걷어부치고,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호소하는 것은 모두 내년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김일성 출생 100주년을 맞아 식량난과 경제난을 해소해 강성대국 진입을 선포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를 김정은의 성과로 포장해 3대 세습을 마무리짓겠다는 계산이다.
적어도 이런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는 김정은이 외국 방문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현재 김정일과 김정은 간에는 일종의 역할분담 체계가 형성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으로서는 북한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되는 그런 임무를 맡고 있고 김정일로서는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목표를 제시한 2012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해외 외교를 활발히 전개해야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김정일의 해외순방에 김정은이 수행을 하는 것은 현재 적절한 시점은 아니라고 봅니다."
김정은의 외국 방문 시기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건 방문의 형태이다.
아버지를 수행하는 형식일지, 단독방문일지 여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망은 팽팽하게 엇갈린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내년 정도에 강성대국 원년을 북한이 선포하고 그런 과정에서 경제적인 성과 또는 6자회담의 재개의 어떤 흐름들이 만들어질때 김정은이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에 데뷔하는 이런 형식을 띄는데 그 과정에서 김정일위원장이 김정은을 데리고 가는 이런 형태가 가장 안정적인 어떤 형태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앞으로 김정은이 중국을 방문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김정일이 83년에 중국을 방문했던 것처럼 단독 방문의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 아 보입니다. 만약 김정은이 김정일의 방문에 수행하는 형식으로 중국이나 다른 국가를 방문하게 된다고 하면, 그가 아직도 제 2인자로서 위상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그런 인상을 줄 우려가 있습니다."
김정은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대국에 엄청난 인적, 물적 부담을 주는 특별열차를 계속 고집할 것인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북한 내부에서 최고 권력자의 모습은 언제나 철저한 검열과 통제 속에서 외부로 공개된다.
최고 권력자가 외국을 방문할 때만 걸러지지 않은 모습을 제한적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누구를 데리고 외국을 방문할지는, 북한의 권력 판도 변화와 김정은의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