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영계에서 변방이나 다름없는 한국으로서는 세계선수권대회 유치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방에서 개최될 세계대회는 한국 수영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한국선수들에게는 높기만 해던 세계의 벽을 낮출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세계선수권대회는 그동안 한국 수영이 다가서기 어려운 무대였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호령했던 '물개' 조오련과 '인어' 최윤희조차도 세계선수권대회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통해 국제무대에 첫선을 보인 한국 수영은 1973년 시작된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1991년 호주 퍼스 대회 때 처음 출전했다. 국제수영연맹(FINA)이 기준기록을 엄격하게 적용해 일정 수준 이상의 선수만 출전할 수 있도록 하다가 1986년 마드리드 대회부터 기준기록을 없애면서 한국 수영 선수들에게도 출전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당시 한국수영의 대들보로 꼽히던 고교생 이윤안과 지상준이 한국인 첫 세계대회 출전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 중 이윤안이 접영 200m에서 16명이 겨루는 준결승까지 올라 2분02초57로 12위를 차지했다.
이후 1998년 호주 퍼스 대회 때 한규철이 남자 접영 200m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8명만이 나서는 결승 진출의 쾌거를 올렸다. 한규철은 결승에서 7위를 기록했다.
한규철 이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 출발대 위에 서 본 한국 선수는 고작 세 명 더 나왔다.
2005년 캐나다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이남은이 여자 배영 50m에서 결승에 올랐다. 비록 최하위에 그쳤지만 한국 여자 선수로는 첫 결승 진출이었다.
한국 수영의 희망을 본 것은 '돌연변이' 같은 박태환이 등장하면서다.
박태환은 2007년 호주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한국 수영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을, 그것도 금빛으로 장식하는 위업을 이뤘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도 동메달을 수확했다.
이듬해 베이징올림픽에서도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고 자유형 200m에서는 은메달을 수확한 박태환은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남자 자유형 200m, 400m와 1,500m에 출전했지만 세 종목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하며 쓴맛을 봤다.
박태환은 2011년 상하이 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세계 정상 자리를 되찾고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이 대회에서는 남자 평영 200m에 출전한 최규웅도 평영 종목에서는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 한국 수영에 희망을 안겼다.
준결승에서 2분11초27의 한국 신기록을 세운 최규웅은 결승에서 다시 2분11초27로 한국 기록을 단축하고 7위를 차지했다.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이하 싱크로)과 다이빙도 점점 가능성은 찾아가고 있지만 아직 세계 수준과 격차는 크다.
선수층이 엷은 수구나 정식종목이 된지 얼마 안되는 오픈워터 종목에는 출전조차 못 하고 있다.
한국 싱크로는 1998년 호주 퍼스 대회 때 솔로, 듀엣, 단체전 등 3개 전 종목에 걸쳐 12명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해 단체전에서는 8위, 솔로와 듀엣에서는 각각 9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모두 아직까지 부문별 최고 성적으로 남아 있다.
당시 최유진(당시 고려대)이 9위를 한 솔로 부문에서는 장윤경이 2001년 후쿠오카(일본) 대회 때 10위에 올랐지만 이후로는 예선 통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캐나다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유나미-김민정 조가 듀엣 부문 결승에 올라 12위로 대회를 끝냈다.
2009년 로마 대회에서는 박현선이 솔로 부문에서 결승에 올라 역대 최고 성적에 도전했지만 역시 12위에 그쳤다.
2011년 상하이 대회에서는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다이빙은 2009년 로마 대회에서 권경민-조관훈 조가 남자 10m 싱크로 플랫폼 결승에서 6위에 오른 것이 역대 최고 성적이다.
이전까지는 2007년 멜버른 대회에서 김진용-오이택 조가 11위를 차지한 것이 가장 좋은 결과였다.
국내 체육계는 광주시가 유치한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한국 수영이 한 단계 도약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만큼 의미있는 국제대회를 안방에서 개최하게 됐지만 유치 과정에서 드러난 광주시의 국무총리 서명 위조 파문은 한국 수영계의 큰 경사를 반감시켰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