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를 반납한 차두리(서울)는 아버지 차범근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하면서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데 아쉬움을 드러냈다.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뉴질랜드와의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생활을 정리한 차두리는 "항상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명성에 도전해왔다"며 "아버지보다 잘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어느 순간 현실의 벽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날 주장으로 선발로 나선 그는 전반 42분 김창수(가시와 레이솔)와 교체된 후 하프타임 때 국가대표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식에는 아버지 차범근 전 수원 삼성 감독이 나와 국가대표로 마지막을 맞은 아들을 격려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차두리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차두리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보는데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서 굉장히 홀가분했고 한편으로는 큰 아성에 도전했는데 실패한 데 대한 자책, 아쉬움이 남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너무 축구를 잘하시다 보니 아무리 잘해도 그 근처도 못 가니까 속상했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밉다"면서도 "그래도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고 롤모델로 삼은 분"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차두리는 "선수로서 더 많은, 훌륭한 일을 해낸 친구 (박)지성이나 선배님들이 있었는데 제가 한 것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며 "감사하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너무나 행복한 축구선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고 털어놨다.
다음은 차두리와의 문답.
-- 은퇴식 영상을 보며 눈물 흘린 이유는.
▲ 저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게 맞다. 분명히 선수로서 더 많은, 훌륭한 일을 해낸 선배님들, 친구 (박)지성이도 있었는데 그런 많은 팬 여러분의 함성을 제가 받을 수 있었다. 팬 여러분의 고맙다는 영상 메시지를 봤을 때는 제가 한 것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느껴져 감사하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너무나 행복한 축구선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
-- 아버지가 은퇴식 때 나타났을 때 기분은.
▲ 아버지께서 운동장 나왔을 때는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항상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명성에 도전했다. 아버지보다 잘하고 싶었고 잘할 수다고 믿어왔는데 어느 순간 현실의 벽을 느꼈다. 그때부터는 내가 축구를 즐겁게 하고 축구를 하면서 행복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와 좀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데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서 굉장히 홀가분했고 한편으로는 큰 아성에 도전했는데 실패한 데 대한 자책, 아쉬움이 남았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너무 밉다. 축구를 너무 잘하셔서 아무리 잘해도 그 근처도 못 가니까 속상했다. 그래도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고 항상 롤모델로 삼은 분이다. 아버지 역시 제가 세상을 살면서 받을 수 있는 행복이고 사랑이었다.
-- 차두리에게 아버지 차범근이란.
▲ 축구적으로 모든 것을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날 가장 잘 알고 경기 전후에 나에게 경기 어떻게 하라고 알맞게 지시해주시는 분이다. 또 아버지로서 항상 사랑으로 제가 힘들 때 보듬어주셨다. 일, 사생활 등 모든 것을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복이다.
-- 손흥민(레버쿠젠)이 뉴질랜드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할 때 기분은.
▲ 흥민이가 넣겠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웃음). 처음엔 저보고 차라고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거절했다. 왜 (기)성용이가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골을 넣은 이재성(전북)의 활약을 평가하자면
▲ 재성이처럼 어린 K리거가 활약을 해줬다는 것은 K리그에 있는 어린 선수들에게도 큰 희망을 줄 것이고 대표팀 경쟁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이기려고 끝까지 경기해준 후배들에게 감사하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은.
▲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청소년 대표도 안 한 대학생 선수를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 큰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피드, 파워가 좋다는 그 장점만 크게 사서 월드컵까지 데려가 주셨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인터뷰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 받고 축구 그만둘 수 있게 된 시발점은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대표팀에 뽑아주셨기 때문이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 아시안컵 8강 우즈베크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축구선수로서, 고참으로서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경기였다.
아시안컵 소집하자마자 후배들에게 개인 욕심 버리고 이 팀 이기는 데만 초점 맞추자고 당부했다. 나이 든 선수부터 희생할 테니 후배들한테 따라오라고 했다. 그날 벤치에서 시작하고 교체돼 들어갔는데 제가 공격 포인트를 올려 좋은 경기력으로 팀 승리 보탬 돼서 후배들에게 한 말에 책임진 것 같았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경기 흐름을 읽는 것 같다. 선수들 개개인이 어떤 몸 상태이고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파악하게 된다. 그 경기에서 90분 지나고 보니 흥민이가 더는 못 뛰겠다고 하더라. 연장전 들어가면서 팀은 꼭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감독님 전술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할 부분 아니라 입 다물고 있었는데 그날은 너무 이기고 싶었다. 여기서 끝나면 대표팀 생활이 아시안컵 8강에서 끝나기 때문이었다. 연장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께 흥민이가 많이 피곤한데 변화를 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다. 최전방의 (이)근호와 흥민이의 위치를 바꾸자고 했다. 흥민이의 결정력을 믿고 한방을 기다리자고 했고 감독님이 그 말씀대로 따라주셨는데 결과적으로 흥민이가 2골을 넣었다. 어린 선수들은 자신의 경기력에 신경 쓰느라 경기를 읽기 힘들고 고참들이 해줘야 할 역할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한 말을 책임졌고 고참으로서 경기 영향을 줘서 이겼고 어시스트도 했다. 대표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 지도자 계획은.
▲ 일단 서울이 3연패 했다. 지금은 팀 성적이 나게끔 죽으라 뛰는 게 나을 것 같다. 그 이후 차차 앞날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자격증은 몇 년 걸리더라도 독일에 가서 지도자 자격증을 따는 게 목표다.
-- 박지성 등 먼저 국가대표 은퇴한 선배들이 해준 얘기는.
▲ 박지성이 문자 왔더라. 한국 왔다고 밥 먹자고 연락왔다. 내일 점심 같이 먹자고 했다. (김)태영이 형 등 많은 선배님이 축하한다고 해줬다. 고맙더라. 그 선배나 친구들보다 축구를 월등히 잘해서 영광스런 자리를 얻는 것은 아닌데 진심으로 축하해줘서 감사하다.
--후배들에게 한 마디한다면.
▲ 대표팀 훈련, 경기 등 모든 것은 정말로 복받은 일이고 하늘에서 찍은 선수들만 할 수 있다. 그 점을 인식하고 감사하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수많은 선수가 이곳을 원하고 들어왔다가 낙오되기도 하기 때문에 한 번 들어왔을 때 이곳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오래오래 남겠다는 생각으로 대표팀에 들어왔으면 한다. 그래야 대표팀이 강해진다. 우리나라는 유럽, 남미처럼 선수층이 두텁지 않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그 안에서 선수들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선수 개개인이 그 점을 느끼고 계속해서 발전해야 한국 축구가 발전한다. 유럽과 다르게 한국은 대표팀에 의해 모든 축구가 돌아간다. 대표팀이 소속팀 위에 있다. 오늘 같은 평가전도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 아니라 한 경기로 팬들을 잃고 얻을 기회다. 매 경기 열정을 다해 경기해준다면 많은 축구 팬이 더 늘어날 것이고 다음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 낼 것이다. 감사하고 열정을 가지고 선수들이 즐겁게 대표팀 경기에 임했으면 한다.
-- 체격이 좋다는 데 반해 기술이 좋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 얼마 전 기사 댓글을 봤는데 '피지컬은 아버지, 발은 어머니'라고 달려 있더라. 댓글을 보고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공감이 가더라.(웃음) 기술이 화려하고 뛰어난 선수는 아닌 게 확실하다. 대신 다른 데 장점이 있는 선수다. 유럽에서는 선수 장점을 가장 크게 본다. 어떤 하나를 잘하면 그 점을 극대화해서 팀에 기용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선수가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지금 대표팀 선수들이 그 점 때문에 위축받는다. 완벽한 선수는 없다. 저만 봐도 훈련할 때나 경기 나가서 자철, 태희, 성용이 공 차는 것 보면서 축구 정말 잘한다고 놀란다. 그러나 나는 잘하는 게 따로 있고 그 점이 팀에 도움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선수는 장단점이 있다. 우즈베크전도 보듯 흥민이는 결정력 좋으니 전방에 서도 되고 근호는 결정력은 떨어져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선수다. 그러다 보니 팀이 이긴다. 단점을 보고 선수 평가하지 말고 장점 보면서 축구를 봐줬으면 좋겠다.
-- 한국 축구의 경쟁력을 평가하자면.
▲ 개인 능력으로 보면 우리 선수들이 굉장히 뛰어나다. 유럽에서 있으면서 놀란 점은 참 열심히 한다는 말이 큰 함정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수 대부분이 '열심히 했어'하고 경기 끝나고 말하는데 유럽은 '열심히'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잘해야 한다고 하더라. 대학교 때 아버지와 경기 후 통화하는데 아버지가 "이젠 열심히 아니고 잘 해야지"하시는데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근데 그게 정답이다. 세계축구에서 열심히는 기본 바탕이 됐다. 유럽 선수들은 뛰는 양, 이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게 기본 바탕이다. 그다음으로 간결하고 정교하게 하는 게 잘하는 거다. 우리 선수들은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 열심히 한다는 기준을, 많이 뛰고 투쟁하고. 공격수도 수비도 하고 상대를 괴롭히고 수비도 끝까지 상대를 괴롭힌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돼야 세계수준에 근접하게 된다.
--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축구 인생을 스코어로 비교할 때 3-5로 지고 있다고 했는데. 현재 축구 인생을 스코어로 비교하자면.
▲ 3-5 그대로다. 대신 골대 두 번 정도 맞힌 게임이다. 아쉬움이 약간 남는다. 타이틀이 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면 얼마나 우승하느냐, 이기느냐가 남는다. 한편으로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아시안컵 결승, FA컵 결승 등 매해 타이틀 딸 수 있는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간 점은 뿌듯하지만 결국 빈손이었다.